이 글의 제목은 하비 콕스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 When Jusus came to Harvard》(문예출판사, 2004년 간 오강남 역)의 한 챕터의 제목과 같습니다. 하비 콕스 교수가 1980년대 초부터 20여 년 동안 하버드대학교 학부에서 강의한 '예수와 윤리적 삶'이라는 과목을 총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스 24」에 소개된 이 책의 내용은 "이 책은 단순한 강의록의 수준에서 벗어나 예수와 현 세계의 급변하는 윤리적ㆍ도덕적 상황의 관계, 다원화되어 가는 종교와 그 사이의 갈등과 나아갈 바를 한데 아우르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1세기 랍비 예수를 21세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해내야 하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저는 그 교수의 강의에, 여기서는 그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질문 하나를 끄집어내고자 합니다. "성경은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고 있는가?"
사실 이 주제는 제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내용들을 다루기에 몇 권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글들입니다. 각 글마다 먼저 출처를 밝히고 제 나름대로 약간 수정했습니다.
1
먼저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마이클 고힌 공저, 《성경은 드라마다》(IVP 간), 서문에서 발췌한 글을 인용합니다.
(이 책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구속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계속되고 있는 그분의 사역에 대한 통일성 있고 일관적인 이야기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반역이 그 세상을 훼손시킨 이후,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회복하는 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망해가는 세상에 등을 들리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그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리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자기 백성과 자신의 나라인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해 기나긴 구속의 행로를 시작하셨다.” 성경은 기나긴 구속의 행로를 가시는 하나님의 여정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서 한결같이 그리고 점진적으로 펼치시는 활동의 드라마다. 성경은 역사, 시, 도덕 교훈, 신학, 위로를 주는 약속, 인생을 지도하는 원리와 명령 등을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근본적으로 아주 일관된 책이다. 성경의 모든 부분, 즉 각각의 사건, 각 책, 인물, 명령, 예언, 시 등은 한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성경은 드라마다”라는 취지의 글입니다. 역시 같은 책에서 인용하되 편집한 것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는 주전 2세기의 극작가 테렌스(Terence)가 로마의 극장에서 상연하기 위해 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된 희곡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로 서양 희곡의 전통이 되었던 점에 착안하여 이 5막 구조가 길고 중요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특별히 적합한 구조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성경 이야기를 5막(창조, 죄, 이스라엘, 그리스도, 교회)으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에 6막을 덧붙인다면, 성경 강림사건(사도행전 2장)이 있었던 오순절과 예수님의 재림(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온다고 약속하였고, 요한계시록에는 제장 중 요한이 환상 속에 본 종말의 모습 가운데 예수의 재림 장면이 있다) 사이에 있는 지금 현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는 자들의 중요한 과제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러내실 결론을 준비하며 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5막의 두 번째 장면을 적절하게 지어내는 것은 배우들(교회)의 몫입니다.
1막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다: 창조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해 꼭 필요한 정보를 줍니다. 이는 안정적인 상황, 즉 아주 선한 창조 세계를 묘사합니다. 인간 배우들은 동산에서 자신들의 일을 시작하고, 역사가 시작됩니다.
2막 반역이 일어나다: 타락
하나님의 계획에 대항한 기이한 원수의 등장으로 갈등이 도입됩니다. 이것이 우리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의 기원입니다.
3막 왕이 이스라엘을 택하시다: 구속의 시작
갈등(인간의 죄와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 사이의)이 고조되고 여러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 납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세우십니다.
장면 1: 왕을 위한 백성
장면 2: 백성을 위한 땅
막간 끝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신구약 중간기
4막 왕의 오심 : 구속의 성취
하나님이 반역한 피조물들을 은혜롭게 다루시는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5막 왕에 대한 소식이 전파되다: 교회의 선교
장면 1: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장면 2: 그리고 온 세상 속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 사역이 그분의 공동체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봅니다.
6막 왕의 귀환: 구속의 완성
성경 이야기는 분명 5막의 결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5막으로 완성되는 것은, 부드러운 해결이 아닙니다. 그 해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갈등은 계속되고 실제로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창조 세계 전체가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이천 년쯤 전에 그분의 아들이 죽고 부활함으로 성취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창조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은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 세상에서 아직 마쳐지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들어올 것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직 오르지 않은 또 다른 막,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거나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막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3
역시 같은 책에서 발췌하여 요약합니다.
3-1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의존합니다. 실제로 철학자, 신학자,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야기는. …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세상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큰 배경 이야기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경험들은, 우리가 이 세상의 진정한 이야기라고 믿는 어떤 이야기의 맥락이나 틀 속에서 볼 때에만 이해되고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한 포괄적인 이야기들은 보편적인 역사의 의미를 알려 줍니다. 이를 ‘거대 서사(grand narrative)’, ‘큰 이야기’, ‘메타내러티브’라고 부릅니다. 우리들 각자는 (그것을 알든 모르든) 한 가지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틀을 잡고 인생 경험의 의미를 찾기 위해 우리는 모두 어떤 특정한 이야기에 의존합니다.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이에 동의하면서, 우리가 이 큰 맥락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알 때에만 삶의 결정들을 제대로 질서 있게 내릴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어떤 이야기에서 나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라는 우선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3-2
우리는 성경이 세상 전체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인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한다고 한 톰 라이트의 말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통해서 인생 전체와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경 이야기가 포괄적이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우연히 물려받은 이야기여서도 아니고, 우리에게 유용한 이야기여서도 아닙니다. 기독교 이야기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창조로 시작해서 새 창조로 끝나는 역사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진실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존재 방식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성경 이야기가 자신의 삶에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란 정확히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기독교 이야기를 접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다. 교회의 예배는 (자유로운 은사주의적 형식이든, 좀더 전통적인 예배이든) 우리 삶을 형성시키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찬양과 합창은 그 이야기를 경축한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신경들로 그것을 암송한다. 설교는 매주 우리 삶에 그것이 갖는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기독교 이야기에 대한 권위 있는 원천은 성경 자체다.
정통 기독교는 성경이 신앙과 삶의 규범이며, 중요한 규칙이며 인도하심의 근거라고 항상 주장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분명히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동의하지는 못했던 것은, 성경이 신앙과 삶을 인도할 때 그것이 기능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벨직 신앙고백처럼 체계적인 명제들의 목록인 것처럼 다룬다. 성경이 이러한 위대한 문서들의 궁극적인 근거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명제적인 진리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쓰여지지 않았고, 그런 신앙고백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성경 연구 분야에서 일어난 가장 흥미로운 발전 가운데 하나는, 일부 학자들이 성경은 이야기 형식임을, “광대하고, 넓고, 포괄적인 내러티브”임을 점차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것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이해하는 기본 이야기가 될 때, 그리고 우리의 결정과 행동이 토대로 삼는 기초가 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데 필요한 기본 이야기를 제공해 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것과,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도록 성경을 읽는 법을 아는 것은 종종 전혀 다른 것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의 내용과 우리가 사는 모습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성경을 이야기 형태로 주셨다면, 성경을 이야기로 대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로 활용할 때에만, 우리 삶 속에서 성경의 권위와 조명의 영향력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성경을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것, 이는 아주 흥분되는 일이다. 그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참여하라고 초대하고 있다. 아니,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다양하고 중요한 주제들을 끌어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계시 전체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문들입니다. 우리는, ‘언약’(구약에서)과 ‘하나님 나라’(신약에서)가 정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문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들어가서 그것을 하나의 전체적이고 광대한 구조로 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다윗 왕과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서에서, 후일에 세우실 새 언약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널리 가르치시는 사역의 주요 주제가 하나님 나라인 것은 분명합니다. 마가복음(1:14-15)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언약과 하나님 나라를 성경의 주요 출입구로 본다고 해서, 다른 출입구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그리고 결국 창조 세계 전체를 통치하시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행해 나가실 때,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특별한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언약이란 왕들이 자기가 다스리는 백성들과 세운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과 언약 관계에 들어갈 때, 그들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되어 그분의 통치 아래 살아야 합니다.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언약 역시 우리가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실체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언약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실체를 다루며, 성경이라는 성당에 들어가는 주출입구의 양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책의 구조로 삼는 이유입니다. 둘 다 우리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왕 하나님께 주목하게 합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그분의 통치 아래 살면서 창조 세계 전역에 그분의 임재의 향기를 퍼뜨리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둘 다 이것이 항상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지만 사태가 상당히 나빠졌다는 데 주목하게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그분이 계획하신 일을 회복하기 위해, 처음부터 오랫동안 품고 계셨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치유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의 언약들은 좁게 이스라엘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항상 모든 민족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는 분명 모든 민족과 창조 세계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이 양문을 통해 성경으로 들어갈 때, 언약과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이야기 흐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성경 이야기는 창조로 시작해서 거기서부터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그 분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바른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4
하버드 신학대학의 신학 교수, 하비 콕스Harvey Cox는 그의 저서 《예수 하버드에 오다 When Jesus came to Harvard》(문예출판사)에서, “우리는 이야기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한 이야기꾼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단 몇 사람만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데, 랍비 예수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이다. 사복음서는 예수가 한 이야기들과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기본 자료다. 이 복음서들은 설화라고 하는 실에 꿰여 있는 진주 수집품이다. 그 중 약 반은 예수의 말씀이고 다른 반은 예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5-1
그는 이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복음서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있는 절대적으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역사 비평학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교수들은 이것이 신화며, 전설이라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소포클레스나 세익스피어, 밀턴들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는데, 그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리처드 3세나 오이디푸스 왕과 같이 실재적인 역사적 인물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심각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반드시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이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설득력 있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그러니까 성경은 어느 정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목적으로 하는 「예수의 윤리적 의미」(그가 개설했던 강좌의 이름은 「예수와 윤리적 삶」입니다)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예수’의 진상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학자들의 노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신충분히 방해받지 않고, 윤리적 도덕적 가르침을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이 “비록 상당 부분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영적 효용성을 불신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하브 콕스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소설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후 반세기가 지나 톨스토이가 그 책을 쓰던 당시의 러시아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그 전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 주장하지 않지만 소설이기에, 인간의 조건, 특히 러시아인의 정신을 묘사하는 완전히 다른, 그러면서도 똑같이 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다루지만 영적 효용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절대 동의하지 못할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비 콕스는 능숙하게 이런 항변이 있을 것을 예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을 것이 못된다면 어떻게 거기에 나오는 종교적, 윤리적 진리를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5-2
여기서부터 하비 콕스의 주장을 요약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복음주의 기독교 진영에서는 절대 동의하지 못할 내용이지만 기독교 영역 바깥에서 이런 논의들이 오고 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 사람들은 “단순히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쓰는가? 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 아는 대로의 역사 기록 방식은 오로지 근대에 이르러 계발된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성경을 포함하여 인류의 정신을 살찌운 문헌들 대부분은 역사물이 아니라, 시, 전설, 신화, 무용담 같은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당황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이유로 성경 이야기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성경 이야기들이 현재에서 의미를 찾고 미래를 준비하게 위해 노력한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과거를 선별해서 상상력을 가지고 활용한 결과로 생긴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를 인용하면서) 물론 사려 깊은 사람들 중에는 실제 역사에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찬양하거나 심지어 그런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편적 사랑, 원수에 대한 용서, 다른 사람들이 살기 위한 자기 희생” 같은 그리스도의 이야기, 심지어 그리스도도 오로지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의 주제에 불과하다고 해도, “인간들이, 자기들은 알지도 못함을 아는 피조물들이,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참 하나님이 육신을 썼다는 이야기와 똑같이 기적적인 (기적적으로 신비로운 ) 일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비록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고 고상하게” 한다.
에코의 생각에 완전 동의할 수는 없니다. 인간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의 기분을 더욱 좋게 해줄 수 있다고 하는 사실, 나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이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내가 너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현실적 인간이다. 나는 무엇인가가 내가 사는 역사에서,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대지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것, 그리고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던 구체적인 사람들에게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뒤엉키고 범벅이 된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근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이야기에서 ‘참됨’이란 뉴스 거리에서나 실험실 보고에서 말하는 ‘참됨’과 다른 무엇이되, 참된 이야기란 가장 깊고 가장 복잡한 차원의 삶에 참된 이야기라는 뜻이다.
종교적 설화는 모든 설화들과 마찬가지로 해독이 될 수도 있고 이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야기의 세계에서 종교적 설화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모든 설화에서와 같이 종교적 설화는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과 왕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설이나 노래나 무용담 같은 형식을 통해 어려품하게나마 기억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요나나 에스더의 이야기처럼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선지자 에스겔의 이야기에 나오는 바퀴와 불병거처럼, 혹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전갈이나 용처럼 상상적인 비전의 결정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다른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것들이, 그것들 자체를 넘어, 경험적 입증이나 반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결정적 차원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 이야기들은 마음뿐 아니라 몸과 모든 감각을 설화에 쏟아 넣는 예배 의식과 같이 짜여져 있다. 종교적 이야기들은 역사적 연구나 과학적 연구에 의해 참되다 혹은 참되지 않다고 증명될 수가 없다는 것. 사람이나 사람들을 이런 궁극적 차원으로 적절하게 맺어주는 일을 하지 못할 때 그것들은 참된 것이 못 된다. 결국 종교적 이야기들은 객관과 주관, 사실과 가치, 산문과 운문의 예리한 차별화를 강조하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종자에 속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종교적 이야기들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빠질 수 없는 필요 불가결의 요소를 제공해주고 있고, 이런 종교적 이야기들이 없는 삶이란 상상하기 곤란하다고 밖에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시대에 왜 ‘사실성(factualness)’이 진리와 동의어가 되었는가 하는 끈질긴 딜레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정보’의 홍수가 의사 소통을 위해 선호하는 수단이 되므로 설화 같은 것이 밀려나게 된 때문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실로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마음과 정신의 삭막함이 따를 뿐이다. 우리에게 사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그런 사실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오랜 기간에 걸친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과학이나 논리와 함께 설화나 이야기가 우리의 경험을 조직화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설화가 없으면 우리에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단편적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설화는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본적 틀을 제공해 준다. 설화라고 하는 실이 없으면 세상이라고 하는 천은 걸레나 넝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그건 단지 이야기에 불과해!” 하는 것보다 “그것은 단지 사실에 불과해!”라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거나 더욱 의미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이야기들이 좋은 이야기를 쫓아내면 곧 설화 자체가 곪기 시작한다. 설화가 없으면 윤리적 사유도 불가능하게 된다.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고 싶은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분간하기 위해서는, 내가 학생들과 토의하면서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출신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철학자 앨러스데어 매킨타이어를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가 어느 이야기나 이야기들의 한 부분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실에 대해 편집광적 집착을 나타내는 것은 좀 더 깊은 잘못에서 나오는 증상일 것이다. 그것은 점증적으로 빨라지는 현대 생활의 미친 듯한 속도와 밤낮으로 사방에서 밀어닥쳐서 우리들 삶의 시간적인 면을 조직화할 능력을 퇴행시키는 정보의 과부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랍비 예수는 전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이야기꾼이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도 서로 겨루고 상충하는 설화들의 세계에 살았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한 이야기들은 우열을 다투던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오래전에 사라져 잠잠해진 이후 아직까지 계속 살아 있는 이야기들이다. 누가 지금 로마 황제의 영광과 권력을 노래하고 있는가? 누가 지금 이집트 신 이시스, 페르시아의 신 미드라스의 어두운 신비를 읊조리고 있는가? 그러나 이 팔레스타인 랍비의 이야기들은 2천년 이상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되풀이되고 있지 아니한가? 그의 이야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오늘 이 시대를 위한 그의 영적 윤리적 가르침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첫발을 디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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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성경의 저자이자 영성 있는 작가인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쓴 《현실 하나님의 세계 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와 《이 책을 먹으라 Eat This Book》(모두 IVP 간)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6-1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성경의 내용에 영감을 주셨다는 것을 익숙하게 믿는데(디모데후서 3:16), 내용과 마찬가지로 글의 형식도 영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문학 형식도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맨 처음 씌여진 복음서는 마가복음이라는 주장이 우선합니다. 그 복음서의 저자인 마가가 모세와 사무엘 같은 히브리의 이야기꾼들을 좋은 스승으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서사의 형태로 씌여졌는데, 이 거대하고 다소 산만한 성경적 서사 안에서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라는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은 그것이 수세기에 걸친 히브리식의 스토리텔링, 즉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통해서 그분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그 방식을 예수의 이야기, 즉 그 모든 이야기의 목적이자 성취요 성숙한 완성이 되는 예수 이야기로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로마 통치하에 있던 팔레스틴의 고대 역사 중 아주 작은 부분인, 예수와 예수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다 읽기 전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자신이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이는 분명 계시의 방식, 즉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그리고 독자를 초청하고, 나아가 독자의 참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신화 지어 내기를 선호하는 고대의 방식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화는 대체로 우리를 초자연적인 것을 감상하는 구경꾼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도덕 철학과 ‘알기 쉬운’ 지혜를 선호하는 현대의 방식과도 대조되는 것입니다. 즉, 더 새롭고 이색적인 천국의 오락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치는 들뜬 구경꾼이 되는 것을 막아 주고, 발 벗고 나서서 세상의 짐을 짊어지는 불안에 찬 도덕주의자가 되는 것을 막아 줍니다. 복음서의 형식 자체가, 우리가 단순한 구경꾼 혹은 단순한 도덕주의자가 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한 것들은 독자를 자기 자신의 구원을 책임지는 자리에 놓습니다. ‘복음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주제인 성육신처럼, 신적인 동시에 인간적인 실재를 설명하는 구술 방식입니다. 그것은 계시합니다. 즉 우리가 관찰이나 실험이나 추측으로는 결코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없는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참여시킵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부과하지 않으면서 수혜자와 동참자로 우리가 그 행위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예수의 구원 이야기는 좀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읽으면서 정말로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 대해서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사실상 전혀 알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의 출신 배경, 친구, 교육, 가족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을 평가하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분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기분이 어떠셨는지, 그분의 감정과 내면적 시름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예수를 찾아내지도 못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예수와 그가 구현한 구원은 소비재가 아닌 것입니다.
6-2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따라서 영성 신학의 텍스트이기도 한 그 텍스트는, 바로 예수를 받아들이고 성령을 굳게 붙들며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고 삼위일체의 틀을 가진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거대하고 포괄적인 이야기, 바로 메타 이야기(meta-story)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이야기의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대체로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대하고 광대한, 불규칙하게 뻗어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제일 중요한 말의 수단입니다. 실상 이야기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말의 형식입니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모두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문맹이든 아니든 모두가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식한 사람이든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든 누구나 이야기의 자장권 안에 있습니다. 접근성과 매력의 차원에서 유일하게 이야기와 경쟁하는 것이 노래인데, 성경에는 그것도 참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듣는 것은, 하루하루의 실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설명해 주는 최고의 언어 수단입니다. 이야기에는 추상적인 것이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고 플롯이 있고 관계적이고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자기 삶 및 자기 영혼(도덕적이고 영적인,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성이 구현된 삶)과의 접촉을 잃어버렸을 때 다시 그 접촉을 회복하게 해주는 최선의 언어 수단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대부분 이야기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광대하고 모든 것에 우선하고 모든 것을 망라하는 이야기, 즉 메타 이야기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주요 수단으로서 이야기가 적합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좋은 이야기꾼은 우리를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우리는 그 감정을 느끼고, 그 드라마에 사로잡히고, 등장 인물에 동화되고, 우리가 그냥 지나쳐 버린 인생의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게 되고,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껏 탐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그 이야기꾼이 정말로 탁월하다면 인생의 모든 창과 문이 열릴 것입니다. 히브리인이든 헬라인이든 성경의 이야기꾼들은 도덕적이고 심미적인 의미에서 모두 탁월했습니다.
정직한 이야기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으며,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흩트리지도 않습니다. 정직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믿음을 통해서(여기에서 상상력과 믿음은 가까운 친척이다) 우리가 그 이야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아라고 하는 숨 막힐 것 같은 벽장 속에 갇혀서 순식간에 요리해 내는 잡담 같은 일화와는 참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내용에 적합한 형식 즉 기독교의 계시에 잘 맞고 각 사람의 존엄성과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모든 특이한 습성과 개성들을 담을 만큼 충분한 여유가 있는 형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형식을 제공해 줍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죄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필요나 우리 문화에 의해 제한된 야망보다 더 진실한 무엇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 들어가서,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모세와 미리암, 한나와 사무엘, 룻과 다윗, 이사야와 에스더, 마리아와 마르다, 베드로와 바울의 삶에서 우리의 삶을 ‘읽는’ 법을 배움으로써 얻게 되는 여러 가지 환영할 만한 결과들 중 하나는 확신을 얻고 자유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동반자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먼저 미리 조립된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틀에 들어맞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자리을 얻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이야기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읽기는 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도덕적 규칙을 제시해 주면서 “여기에 맞게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혹은 교리 체계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면 잘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안으로 들어와 살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이 되어 가고 인간으로 성숙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위해서, 혹은 밋밋한 생활에 색채와 양념을 더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할 때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침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늘 일종의 ‘장식 영성’을 낳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기 향상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 삶을 성경에서 읽는 내용에 굴복시키면, 우리 이야기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우리 이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야기가 진정한 이야기가 되는 더 큰 배경이며 플롯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