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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관한 크고 작은 소감들

이스라엘의 이야기: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

by pooh_in_the_Way 2021.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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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천국

 

하나님 나라 관련된 어구,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어구의 서기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한 용법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소망들 기대들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일반적인 종교적 후광을 지닌 모호한 어구가 아니며, 또한 그것은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사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는 어떤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인천국 아주 오랫동안 일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구원받은 영혼들이 사후에 가서 살게 되는 하늘에 있는 의미한다고 오해되어 왔지만, 예수의 세계 속에서는 그런 유의 의미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천국이라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을 유대적으로 말하는 방식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왕이 되셨을 , 세계, 시공간의 세계는 마침내 올바르게 제자리를 잡게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적 종말론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라거나 왕이 되신다는 개념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이 능력 중에 임하셔서 그가 항상 의도하셨던 방식대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오랜 갈망을 이해하지 않고는 제대로 파악할 없습니다. 예수 당시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적어도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되는 이야기 아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깨뜨려질 없는 계약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의 끈덕진 간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아주 알려져 있었던 이유들로 인해서 자신의 결정적인 행위를 연기하고 있었다. 여호와는 땅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신원함으로써 세계의 질서를 다시 정립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약속들을 지키는 것이 분명한 야훼의 뜻이었다."

그러므로하나님 나라라는 어구는 명확하게 여호와가 이런 식으로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을 신원하기 위하여 행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렇게 하는 데에 여호와는 그토록 오랜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여호와께서 행동하실 때를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날을 향하여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일하고자 깨어있는 심령들을 위한 과제들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가 왕이 되었을 ,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인정한 통치자들에 의해서 적정하게 다스려지게 것이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는 의를, 열방들에게는 심판을 베푸실 것입니다.

 

2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자주천국”(heaven’s kingdom, 달리 번역하면, “하늘나라”) 관해 이야기하지만,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보통하나님 나라”(God’s kingdom) 관해 이야기합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마태복음에서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들을 , 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구절의 의미를너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는 마태가 혹은 예수가 문제와 관련하여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내용이 결코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가면,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예수의 설교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유명한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이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기도문입니다. 기도문의 정중앙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의 뜻이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예수를 발견합니다.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과 관련된 단어가 아닙니다. 말은 하늘의 통치가 땅에 임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가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 그는 하늘이,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주권적인 통치를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도 수립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라는 구절은 사실 교회에서 굉장히 이른 시기부터, 방금 언급한 1세기의 의미(하나님의 통치가 땅에서 실현되는 ) 아닌 다른 의미로 이해되었습니다. 하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장소로서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 장차 예수의 추종자들 모두를 환영하여 받아들일 장소라는 굉장히 상이한 의미로 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자료들을 보면, 적어도 4세기가지도 마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하늘나라, 죄로 인해서 신자들에게는 접근이 금지되었던 곳이지만, 이제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접근할 있게 영역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가 나라 문을 것이 그의 죽음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나라 들어가게 되는 것도 짐작컨대 죽음을 통해서 그리고 죽음 이후라는 것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풍기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천국에 가는 이라고 (적어도) 가정했으며, 따라서 내용에 비추어 모든 것을 해석해 왔습니다. 사후의 축복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모든 성경 말씀이천국에 가는방법에 관하여 강력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기독교는 단지 믿어서 죽고 천국에 들어간다 정도로 내세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통상적으로 오해되는 번째 용어가 바로영생”(eternal life)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천국에 가는 방법이라는 전제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왔고, 자연히 전제가영생이라는 단어를듣는방식을 좌우해왔습니다. 사실, 현대 미국과 영국 영어에서영원”(eternity)이라는 단어는 보통하늘의”(heavenly) 종착점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특정한 내용, 그곳은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벗어난 곳이며, 아마도 마찬가지로 공간과 물질을 초월한 세계일 것이라는 내용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어 왔습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끝이 없는 영원! 하지만 그것은 플라톤적 사고지, 성경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서구 기독교가 처음 정박해 있던 장소로부터 얼마나 멀리 표류해 왔는지를, 그래서 스스로 표류해 왔다는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있습니다. 어쨌건 이러한 전제들을 당연시 하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서들에서 (그리고 신약의 서신들에서도) ‘조에 아이오니오스’(zoe aionios)라는 헬라어 구절을 발견할 , 그리고 구절이 자주영생”(eternal life) 혹은끝없이 지속되는 ”(everlasting life)으로 번역될 , 자연히 이러한영원 개념이 구절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흠정역(King James version, 보통 KJV라고 표기합니다) 요한복음 3:16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begotten Son, 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verlasting life.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끝없이 지속되는 (everlasting life) 소유하게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구절을 바로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구절은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약속하는 성경 구절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그리고 그와 관련된 바울 서신에서 조에 아이오니오스 등장하는 많은 경우에, 구절은 시대 구분 방식과 관련된 유대인들의 신앙의 측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관점에서는 역사에는 시대”(아이온스, Aions) 존재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의미로에온 (e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어로 하올람 하제’(ha-olam hazeh) 시대 하올람 하바’(ha-olam ha-ba) 시대 존재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세상이 시대속에서 고통하며 신음소리를 , 하나님께서 세상에 공의와 평화와 치유를 가져오시는 그날, 시대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바울 서신서들에서도 예수가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가 시대 개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를 정점으로 시대가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시대 가지고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 개념 속에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벗어난 존재 방식이라는 의미에서영원하다 의미는 없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의 창조를 믿었던 유일신론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원대한 미래의 목적은 사람들과 함께 세계에서 구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 자체를, 부패하고 쇠락해가는 상태에서 구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맥락에 맞추어 우리 사고를 재구성한다면, ‘조에 아이오니오스라는 구절은 시대의 생명”, 다른 말로 하면 시대의 생명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서 누가복음에서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에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이시여, 제가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누가복음 18:18, NRSV) 관원은 자신이 죽을 천국에 가는 방법을 물었던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장차 가져 오실 새로운 세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공의와 평화와 자유의 시대에 관하여 물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실 , 자신이 새로운 세계를 상속받을 무리, 생명을 함께 누리게 무리의 일원이 있는지 보증할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한 것입니다. 내용으로 의역을 해봅니다. “선한 선생이시여, 시대의 생명(life of the age to come) 상속받기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이트의 모든 사람을 위한 누가복음 참조).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3:16 해당구절도끝없이 지속되는 소유한다(have everlasting life, KJV)” 아닌, “하나님의 시대의 생명에 참여한다(share in the life of God’s new age)” 번역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초래한 다양한 현상들이 있는데, 하나가 예수의 공생애와 관련된 내용 모두를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도 임하게 하라는 현재를 향한 도전으로 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이른바천국에 가는초대장으로 이해하려는 열정적인 시도들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에서 파생된 추가적인 오해들을 차츰 설명하겠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만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예수는 공생애 당시 가장 유력한 반대 세력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가 꾸준하게 이들과 대적하였으므로, 순진한 기독교인들조차 바리새인들을 사악한 세력으로 몰아 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훌륭한 모범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에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로마의 폭정에 맞서 애국하기 위하여 순교도 불사합니다. 평범한 유대인들은 항상 그들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들어 예화를 때에는 주의하여야 읽어야 합니다. 앞으로 계속 분위기를 설명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아와서, 예수가 그들과 벌인 논쟁을 해석할 전제로 삼곤 했던 내용이, 바리새인들은 그들 나름의천국에 가는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경우에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수많은 규칙들을 지키는 ), 예수는 그와 전혀 다른 하나의 체계,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규칙들을 완화시키고 만사를 쉽게 만들어 놓은 쉬운 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길은 당시의 바리새인도,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충분히 정당하게 다루지 못한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복음서를 읽는 있어 도전적인 방식으로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3

이런 내용들을 모두 담아 마태복음 3 3절까지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이야기> 형식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

 

마태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책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예수의 족보를 기록한 책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삭은 야곱의,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유다는(다말을 통해) 베레스와 세라의, 베레스는 헤스론의, 헤스론은 람의, 람은 아미나답의, 아미나답은 나손의, 나손은 살론의, 살몬은(라합를 통해) 보아스의, 보아스는 (룻을 통해) 오벳의, 오벳은 이새의,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가 되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통해)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었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의, ….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바벨론으로 유배된 , 여고냐는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마리아에게서메시아라고 불리는 예수가 태어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모든 세대 수를 합하면 열네 ,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 합하면 열네 , 바벨론 포로 때부터 메시아까지 합하면 열네 대가 된다. ( 1:1-17)

유명한 족보 이야기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를 언급하는 것은, 예수 당시의 유대인 대부분은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가 제대로 종식된 것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어찌됐건 그들 일부는 바벨론에서 귀환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도 재건했습니다. 하지만 이교도인 이방인들이 여전히 그들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불평했듯이,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도 여전히 노에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이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느헤미야 9:36).

 

이사야(그리고 다른 선지자 에스겔) 위대한 약속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보통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다니엘서 9장의 핵심 구절에 아주 생생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유망한 유다 청년 귀족이었다가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가 바벨론 옆에서 시중드는 환관이 되었던 다니엘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유대 신앙을 지키던 , 이제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예레미야의 에언이 성취될 때가 되지 않았는지, 바벨론 유배가 70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질 때가 아닌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이 돌아옵니다. 70년이 아니라, 일흔 이레가 지나야 한다. 7년이 70 지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답변은 다니엘을 심하게 낙담시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시간은 기다리기엔 너무 길었습니다. 하지만일흔 이레라는 개념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의미는 오늘날 우리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7일마다 안식일을 지켰고, 7 년마다 안식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일곱 지나면 희년을 맞이합니다(아니면 적어도 레위기에 따르면 그들은 희년을 지켜야 했습니다). 희년이 되면 종들이 풀려나고, 가족들이 땅이 원래 소유주에게로 복원되며, 모든 것이 마땅히 되어야 모습으로 되돌려집니다. 희년은 고대 이스라엘의 법률 체제 안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사회적 혁신으로서, 끊임없이 땅과 상품, 심지어는 사람까지 매매하는 상황이 세상의 최종 상태는 아닐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하지만 일흔 이레라고? 그렇다면 희년 중의 희년을 말하는 아닌가! 이런 의미라면 400년하고도 90년이라는 세월은 거의 천년의 절반에 가까운, 정말로 시간이지만, 다음과 같은 요점을 담고 있는 아닌가? 그때가 마침내 이르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구속 일어날 것이다. 진정한, 완전한, 영속적인 자유의 시대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오기 수세기라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을 지탱해 희망이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최종 형태를 갖춘 것은 기원전 2세기 초반, 마카베오 격변기를 둘러싼 시기라고 보통 생각됩니다. 당시 시리아가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고 있었고,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일족들은 저항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박식한 서기관들은 다니엘 9장을 염두에 두고 계산하고 계산하면서, 일흔 이레가 언제 이루어지는지 물었습니다. “포로 상태에서 진정한 귀환은 언제 일어날 것인가?”

 

그리고 마태는 유대인들처럼 생각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반박할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아주 분명하게 순간이 예수와 함께 왔다고 주장합니다. 마태는 햇수가 아닌 세대의 수로, 아브라함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우르는 세대의 수로 질문에 대답합니다. “ 시점까지 모든 세대를 세면 열네 대가 지나갔다. 말하자면 일곱이 여섯 지나간 것이며, 이제 예수와 함께 일곱 번째 일곱에 도달한 것이다.” 예수 자신이 몸소 희년인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지속된 악몽에서 구출할 사람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다”(마태복음 1:21)라고 말했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 누구에게도 말은 개인들이 그에게로 돌이키면 개인적인 사함을 발견할 있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의미도 분명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사야 40장을 다시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포로 상태는 죄의 대가였고, 따라서 사함은 포로 상태의 종식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왕에게 사면을 받는다면, 감옥에서 자유롭게 풀려난다.”(이사야 40:1-2, 축소하여 의역한 ) 때가 것입니다.

 

내용은 현대의 독자들이 가장 파악하기 힘든 내용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아마도 강조해야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태도 강조하는 개념, 예수의 삶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핵심적이었던 요소들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고 있다는 개념을 얼추 이해할 있습니다. (앞으로 5장부터 다룰 내용이지만) 예수가 위에서 유명한 설교를 하던 그때, 그는 모세이었습니다. 그가 안식일에 행한 일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던 그때, 그는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열두 제자를 부르고 이름을 지어주던 그때, 그는 아마도 열두 족장을 낳았던 야곱이었습니다. 그가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던 그때, 그는 엘리야나 엘리사이었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몸이 변화하던 그때, 그는 실제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납니다.

 

이러한 회상 장면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장면들의 의미가 예수의 제자들과, 마태의 독자들에게는 훨씬 명백하고 쉽게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속화된 상상력 밖에 가지지 못한 우리의 -유대화된 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회상 장면들보다, 그리고 고립된 주제들과 암시들을 옛날로부터 추려 내는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단일 이야기가 이제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는 거대한 의미입니다. 예수 당시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이야기는 길을 잃어 목적지에서 킬로미터나 벗어나 버렸고, 어둠이 찾아들고 적들이 에워싼 상황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모든 상황을 뒤바꿀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만큼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우리는 이런 생각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일어난 새로운 사건은 우리가 구출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만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사건은 과거 상태 그대로 이야기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사건이 바로 이야기가 줄곧 향해 갔어야 목적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매듭지어야 했던 복잡한 작업의 일부가 바로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상황을 이스라엘의 소명의 성취로 기술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혼돈과 곤경에 대한 신적인 심판으로 기술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할 있겠습니다. “바로 이거야! 이게 바로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일이야. 전에는 결코 일이 이런 식으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브라함의 가족, 다윗의 자손들, 그리고 포로 상태로부터의 회복까지 모두 아우르는 단일 이야기가 향해 가던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단 말이지.” 일은 이야기가 진행되던 과거의 방식에서 곧장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는 난관에 봉착하여 정체되어 있었고, 희망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야기에는 필요한 일들을 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새로운 행위가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자식에게로 마음을 돌려야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에서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을 해방시커러 오셔야만 상황, 반역과 혼돈 상태에 빠져 있던 것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부르신 세상의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세상 이야기의 축소판이자 박동하는 심장이며, 또한 세상을 구원하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 좋긴 싫건 그들의 어깨에 세상의 운명을 짊어진 백성이 되는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사실을 이해했다면, 당신은 신약의 핵심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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