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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10:1-11:1 파송설교

마 10:34-39 검을 주러 왔노라

by pooh_in_the_Way 202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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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태복음 10:12에서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명령하셨던 예수님이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화와 고통의 표상인 검이 그들에게 가해질 것이며, 그들은 이에 대하여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분리, 분쟁을 촉발시키기 위하여 검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검을 주러 오셨다고 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함입니다. 앞의 내용과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을 평안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 일로 사람들 사이에는 싸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의 대치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을 따르는 것과 분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질서, 세상의 가치, 세상의 힘이 얼마나 취약하고 부족하고 결함이 있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는 세상 나라의 어떤 것들로도 비교할 수 없는 고급한 것이요 세상적인 관계나 가치를 극복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음을 이미 말하였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혈연보다 더 깊이 묶어주고 든든하게 해주는 가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세상적인 가치나 신뢰의 근거들은 비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며 그 나라에 들어오는 자의 내용이나 조건의 기준은 이보다 훨씬 높은 것이며 이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의 ‘세상에’는 ‘이 세대에’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 불화가 얼마나 깊게 관여되어 있는지 가장 견고하다고 생각되는 가족 관계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혈육의 관계보다도 더 깊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칙입니다. 가정은 감정과 반응이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가족과 갈라서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시절에 많은 사도들이 여행을 다닐 때 배우자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여기에서는 놀라우면서도 다소 극단적인 주장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부모 자식 상관 말고 각자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이 중요하다고 큰소리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이 우선순위 목록의 1순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요구였는지를 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가서 숨었습니다. 그래도 도전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모든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제공하고, 모든 것을 약속하는 도전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절대적 요구 앞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품으신 좋은 이상을 예수님이 다른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낫게 가르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의 세상을 떠나 죽으면 가게 될 퍽 다른 세상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러 예수님이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길’을 시작하고 세우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옛 길에서 충분히 만족하던 사람들은 방해받기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길 때문에 가정에 분열이 일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분의 길을 따르면 분열이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사실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등에 대한 구절은 구약 성경의 예언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미 7:6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거기서 예언자는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실 때면 일어나기 마련인 끔찍한 분열을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하실 때는 언제나 구원이 필요 없다고,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이 본문을 인용하시는 이유는 이런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지금 그런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마라. 이것은 너희의 전통에도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마침내 너희를 구원하시는 결정적인 행동을 하실 때는 큰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너희가 가진 성경이 경고한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기꺼이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는 것.”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사람이 자기가 질 십자가를 형장까지 옮기는 관습을 언급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자원하여 고난 받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앞서 고난의 길을 가실 것을 암시하십니다(24절).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밝히 말씀하신 것은 이보다 훨씬 훗날의 일입니다(16:21). 이 문구는 비록 고대 랍비문서에는 그 예가 들어있지 않지만,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써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38 절에 표기된 형식은 제자들이 파송을 받은 때보다 후기의 것으로 추측해야 할 것입니다. 여하튼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거의 스승이 친히 하신 대로(24절) 자기도 이것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희생에 이해관계가 얼마나 실제적인가하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또 다시 그의 특유의 역설적인 화법(mashal)을 사용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목숨’(life)으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여자적(如字的)으로 ‘영혼’을 뜻합니다. 영혼은 목숨[생명]의 좌소로 간주되며 생명 그 자체와 동일시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인간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육체적인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것을 언급하기도 합니다(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전하고자 하시는 본의는, 자신을 희생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자기의 신체적인 목숨을 부지시키는데 연연하는 사람은 영원한 영혼 구원의 길이 막힐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현 시대에서 자기의 목숨을 잃는 자는 그의 영혼을 보존할 것입니다. 28 절과는 달리 몸이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몸도 암시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치열함이나 지극함의 문제가 아니고 전부를 걸라는 것입니다. 전부를 걸라는 것은 무슨 도박을 하듯이 무엇의 조건으로 목적하는 얻을 것을 위하여 뭘 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예수의 목적과 뜻에 맡겨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시는 목표가 내용으로 채우는 자가 되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예수님께 바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결정은 영원한 결과를 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측량할 수 없이 중요함을 봅니다. 세상 생활의 한계 내에서는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 한계 내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럴 때에만 그들은 어느 것이 가치 있는지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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