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35은 전환점의 역할을 하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4:23에 묘사된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대한 개괄적 서술을 거의 글자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됩니다("온 갈릴리"가 "모든 도시와 마을에"로 바뀌었습니다). 마태복음 4:23-25의 개괄적인 내용의 기사에 이어서 전개된, 메시아의 권능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 곧 5-7장의 산상수훈("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마태복음 7:27)과 질병과 자연과 귀신을 통제하고 축출하는 권능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치유 사역(8-9장)에 관한 이야기를 일단락 짓는 역할을 합니다. 이제 마태는 본문을 기점으로 새로운 주요 단락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단락은 10장의 서두 부분(10:1-4)과 함께, 예수님의 두 번째 가르침, 곧 예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의 사명에 관하여 가르치신 말씀을 다룬 두 번째 대단락(10장의 나머지 부분)으로의 전환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면서 "무리들", 곧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목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받지 못하여 고생하며” 유리하는 양 떼와 같았습니다. ‘고생한다’는 것은 근동의 황야처럼 황량하고 비바람을 피할 곳조차 없는 지역에서 혼자 버려짐을 당한 양 떼를 위협하는 위험을 언급하는 말이며, ‘도울 길 없다’는 말은 그러한 양 떼는 결국에는 죽어가고 말게 될 상태를 언급합니다. 그들은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들을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목적 없이 이곳저곳으로 방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며, 거기서 그들에게 힘을 주어 일으킬 자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성 가운데 자칭 목자라고 주장하며, 그와 유사한 종류의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실상 그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보셨을 때 민망한 생각이 드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였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분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없다는 것이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변명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이라는 이미지는 구약 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민수기 27:17,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열왕기상 22:17와 역대하 18:16,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에스겔 34: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스가랴 10:2,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등입니다.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허다한 병과 허약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빈곤 상태, 곧 삶의 중심을 잃고 존재의 목표를 상실한 채 무의미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동일한 표현들이 이제 곧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도 등장합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10:6; 15:24); “길 잃은 양”(18:12);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등입니다. 이 표현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에 대한 것과 모두 연결된 표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당신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며 그들의 목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추수할 일꾼들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그의 제자들에게 눈을 떠 백성들의 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백성들의 상실한 상태를 가장 일하기 좋은 기회인 추수기로 간주해야만 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라는 문구는, 구약의 예언이 실현되고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이 시대를 가리킵니다. “추수”라는 말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의미를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기사들에서처럼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띠고 있는 종말론적인 색채에는 상당한 긴박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시대인들을 보고 단지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만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달리하면, 마치 추수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밀밭과도 같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열망했지만 그것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기다렸지만, 누가 그들에게 그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해 주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 들어야 할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데, 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의 수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곧 추수할 주인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며, 그는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천국 도래에의 책임, 즉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나님께 가서, 그들의 과업을 수행할 수단을 그들에게 주십사고 기도해야 할 책임을 제자들에게 부과하셨습니다.
주기도문 외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가 드뭅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분은 밭의 주인에게 가서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청하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무척이나 빠릅니다. 파송되는 제자들 자신이 그 기도의 응답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다루는 8-9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