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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8:1-34

마 8:18-22 나를 따르라

by pooh_in_the_Way 2021.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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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16절에서,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다는 것으로 보아, 예수가 어두워질 때까지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치유해준 것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밝히지 않은 이유로,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곤란을 받으시던 나머지, 예수는 제자들에게(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아고보와 요한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불특정 다수의 추종자들에게) 호수 편으로 건너 가기로 명합니다. 이 명령을 어쩌다가 듣게  서기관(추종자들 중에 하나로 보입니다)은 예수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따라 가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주저 없이 밝힙니다. 예수의 목적과 의도에 상관없이 세상적인 차원에서 추종하는 자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보인 반응은 일종의 거절입니다만,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20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예수를 좇는다는 것이 세상적인 차원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고 좇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 마 8:21-22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는 것은, 그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 지내는 일을 끝내겠다는 의미보다는, "내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보살펴 드리게" 해달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실상 어떤 류의 일로서도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는 것은 십계명 제오계명에서도 명령한 것입니다. 유대 율법으로는 이런 규정까지 있습니다. 부친의 임종 후 6일간은 추모예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제자에게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예수를 좇으라고 하는 말씀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된 모든 것들과 관계가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라는 요청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모를 효도하는 일과 예수를 좇는 일이 공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사 지내는 일이 죽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륜을 저버리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보상받는 일은 주를 좇는 일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들이 윤리와 도덕을 상회하는 것이지, 윤리와 도덕을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윤리 도적과 신앙이 충돌해 보이는 것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은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차원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좇고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좇는 일로서 반인륜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섬기는 것들은 이 세상 나라에서는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것들이거나 혹은 반대하는 것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은 의인이었습니다. 범죄가 극심한 사회에 살아 그의 신앙 양심이 고통을 받고 또 그가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사는 것을 그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온 천사들이 롯의 집에 거할 때에 그곳의 주민들이 그들을 내 놓으라고 행패를 부려서 롯은 급기야는 딸을 주겠다고 타협을 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으로, 롯과 같은 의인이 10 명이 있다면 그 성에 대한 심판은 보류받는다는 권고를 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는 롯의 가치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로 인하여 보류되고 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롯을 대하기를 언제든지 밀고 들어가서 손해를 감수시켜며, 그들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쉬운 상대로 여깁니다. 그의 가치를 보상해 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정직하고 신실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는 것으로, 세상에서는 보상 받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믿는 자들을 언제나 떠밀어 낼 수 있는 존재로,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로, 언제든지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는 존재로 여깁니다. 우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받고 있는 줄을 알 길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에게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고달픕니다.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6-7장에서 다루었던 말씀과 같이, 믿는 이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행위를 펼쳐 보이지 말아야 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며 많은 능력을 행하였음에도, 예수는 도무지 모른다고 하는, 그런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일로 세상의 복을 받으려고 시작하였으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그나마의 자랑도 못 누리고 또 하나님 앞에 나중에 서서는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는 자리에 떨어진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충성을 고대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던 의무이자 유대인들의 주요한 문화적 및 종교적 정체성 상징이었던 가족에 대한 충성과 가족의 정체성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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