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음으로써 사역을 준비하던 예수에게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선구자의 사역이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이야기는 11장에 가서야 다시 나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14:3-4에 비로소 밝혀집니다. 이 전승은 초대교회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마태로서는 여기서 구태여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가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시기를 세례 요한이 체포된 직후로 설정하기는 해도, 실상 우리는 이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은근히 비치는 것처럼, 세례 요한과 예수 사이가 경쟁적인 관계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의 반응을 기술한 14:13에서도 역사 거의 같은 어휘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잡힘”이라는 말이 장차 예수께서 당하실 일 (그가 붙잡히고 수난을 당하고 이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일)을 암시함으로써 세례 요한이 당한 고난과 예수가 당하는 고난 사이의 연속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는 갈릴리로 '물러갑니다'. “물러가다”로 번역된 동사는 “은거하다”(withdrow)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RSV 참조). 이것은 요한을 옥에 가둔 헤롯 안디파스를 두려워해서, 헤롯의 통치는 갈릴리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그랬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변방의 갈릴리로 은거하신 보다 그럴 듯한 이유는 그가 잠시 유대 당국을 피하여 그곳에서 안전함을 찾으려 했음일 것입니다. 그가 곧바로 그 나라의 중심부에서 사역하기 위하여 가셨더라면 유대 당국의 간섭을 피할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14:13에서는 배를 타고 떠나 따로 빈 들에 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조) 그러나 그것이 갈릴리로 간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신 까닭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바리새인들의 세력 중심권인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요 4:1 참조), 예수에게는 사역을 시작하기에 훨씬 더 적합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중에서도 특히 가버나움을 사역 거점으로 택한 것은, 아마도 그 곳이 몇몇 제자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이제 곧 이어 가버나움에서 제자들을 택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가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신 더 타당한 이유는 그 장소의 입지조건에 있다고 봅니다. 이 마을이 “해변 즉 갈릴리 해변에 있다”는 언급은 이 마을의 입지 조건의 유리한 점을 말해줍니다. 가버나움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중요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 마을이 해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곳에서 갈릴리의 주요 도시들과 요단강 저펀 지역으로 통하기에 용이하였습니다. 오늘날 갈릴리 호수 서북 모퉁이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이 이 고대 도시로 밝혀졌습니다. 그곳의 폐허는 장방 1마일에 이르고 그곳에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인데, 고대 회당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마태가 가버나움을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이라고 묘사한 것은, 아마도 바로 다음에 나오는 이사야서의 인용구 중 “해변 길" 이라는 문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불론과 납달리에 관한 언급에 대하여도 역시 똑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닌 소망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사 9:1의 “후에는” 이라는 문구 참조)이 이제 예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자신만만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구절에서 이사야는 가나안 북부지역이 큰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볼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 지역을 순차적으로 열거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한 때 서부는 아셀 지파, 동부는 갈릴리 바다와 요단강 상류로, 남부는 잇사갈 지파에 의하여 각각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해변 길”을 스불론과 납달리 서쪽 지역, 즉 지중해 방향에 있는 땅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낫다고 생각됩니다. “요단강을 따라”, 그곳은 “요단강 저편”을 언급합니다. 마지막으로 열거된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입니다. 이 곳은 납달리 북쪽에 위치한 고산 지역으로써 이방인들이 오랫동안 거주해 오던 곳입니다. 그즈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후손이 아닌 모든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얕잡아 부릅니다. 이러한 이방인이 갈릴리 주민의 과반수를 차지합니다. 게다가 갈릴리 행정구역은 서로 다른 이방 민족에 따라 나뉜 여러 행정구역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는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 “이방 민족들의 갈릴리”•‘변방의 갈릴리’를 뜻합니다. 갈릴리에서는 할례 받은 이른바 ‘깨끗한’ 사람들이 할례 받지 못한 이른바 ‘불결한’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이 지역은 단순히 히브리어 갈릴(Galil-“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이 명칭이 그 후에 이스라엘이 북부 전체, 즉 갈릴리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 지역이 행정구역상 납달리에 속하긴 하지만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장소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에 나타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란 물론 앞에서 언급한 지역의 거류민들입니다. 그들은 고래로 불행한 상황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수리아와 앗시리아와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에 시달려왔습니다. “이방의 갈릴리”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지역은 이교의 영향을 대단히 받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흑암”과 심연의 그림자인 “사망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비참함은 사회적, 정치적인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구원 약속에 시사되어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그 특성상 종교적, 도덕적인 데 있었습니다.
비록 마태가 여기서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의 사명을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복음서의 독자들은 이 문구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견하고 있음을 간파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입니다(28:19, 24:14 참조).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이 유대인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마태에게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와 ‘이방 민족들’(에드네)이라는 두 낱말이 마태복음 끝마무리에서 다시 쓰입니다(마 28:16-19). 부활하신 주 예수가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에드네)을 내 제자로 삼아라” 하고 명령하시는 대목에서입니다. 예수의 제자들, 곧 예수에게서 배우고 그분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이방 민족에서도 나올 참입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방 민족들의 갈릴리’에서 ‘이방 민족들의 세계’로 터를 넓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퍼뜨리라고 일러두십니다.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갈릴리 지역의 이방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방 민족이 예수의 제자가 되어 구원의 빛을 받게 됩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는 첫걸음을 내디딥니다.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라 불리지만 갈릴리는 예수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시도록 그분께 터를 마련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마 15:24)에게 보내진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이방 사람들과 쉬이 마주치시게 됩니다. 아예 공생애 첫판부터 이방 사람들도 구원을 얻도록, 여러 이방 민족으로 둘러싸인 곳 • 이방 사람들이 섞여 사는 데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네 명 이방 여인들이 끼어든 계보를 거쳐 이 세상에 온 그리스도가 이방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기쁜 소식을 그들이 사는 데에서 전파합니다. 마태는 이사야서 말씀을 끌어다 씀으로 정통 유대 사람들이 갈릴리를 마주하며 지닌 편견을 부숩니다. ‘이방의 갈릴리’가 ‘변방의 갈릴리’이기도 해서 하찮게 여김을 받지만, 이곳이 메시아의 본바닥이라고 갈릴리를 내세웁니다. 넓게는 행정 구역으로서의 갈릴리, 좁게는 가버나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으뜸가는 터를 마련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가 “갈릴리 사람 예수”(마 26:69)로 불리기도 합니다.
NIV 성경에 두 번씩이나 번역하여 언급한, 16절의 “사는“(living)이라는 희랍어 동사의 문자적인 의미는 “앉은”(sitting)이다(RSV, 한글 개역). 그것은 곧 이 비참함이 얼마나 오랫동안, 소망 없이 진행되어 왔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흑암이 깊은 이 곳에 (기쁨과 축복의 상징인) 큰 빛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것은 신적인 구원과 무적의 구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단지 이 북쪽 지역에만 한정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6절에서도 역시 마태의 인용구는 몇 가지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칠십인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칠십인역의 “걷는”, “사는 자들”이라는 문구를 “앉은”, “앉은 자들”라는 문구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같은 뉴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칠십인역의 미래형 동사 “비치리라”를 부정과거형인 “비취었도다”으로 바꾸어 넣음으로써, 히브리어 본문의 완료형 시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까지도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은 아마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라오스”(“백성”)라는 말이 거의 예외 없이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살아 왔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큰 빛”이란 이제 그들이 체험할 수 있게 된 메시아 왕의 임재와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요약한 바로 다음 절(17절)의 기사에서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예수님 사역의 시작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예언 성취라고 복음서 저자는 계시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저자는 예수님의 전 사역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즉 그는 구원과 기쁨과 빛을 가지고 오시는 분,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아니라 전체로, 완전히,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의 그늘을 영구히 쫓아내는 구원의 큰 빛이 떠 올랐습니다.
구세주의 등장과 그의 오심, 구원자 되심을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라고 함으로써, 무엇을 연상시키나? 흑암과 공허와 혼돈 속에 있는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창 1:3의 창조 사역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1:2의 모습, 죄지어 흑암과 절망과 공포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창조 때와 같이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 비약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그분의 사역 즉 공생애의 시작을,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즉 그의 사역의 내용을,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비치는 구원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만드신 것들에 질서와 내용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창조 사역이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과 비극에서 구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물을 갈라 마른 땅을 내듯이, 그리고 길을 내듯이, 저들의 삶에 가치와 소망을 주시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하시고 행하시고 완성하실 구원이라는 것이, 흑암과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되, 빛으로의 구원이며 생명으로의 구원이듯이,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시고 의도하셨던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회복에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예수를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흑암과 사망과 무지와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고쳐내시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과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