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성경에 관한 크고 작은 소감들/부활절에

마가복음 빈 무덤 이야기에 대한 묵상

by pooh_in_the_Way 2021. 3. 30.
728x90

부활의 아침을 장식한 여인들

 

마가의 수난기사(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일 작정을 하고,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밀고하겠다고 하고 하는 기사로부터 시작된다) 여인의 깊은 헌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녀가 아낌없이 예수에게 기름을 붓는 것으로 시작했고, 예수는 그것을 자신의 장사를 위한 준비로 해석했다. 또한 마가의 수난기사는 예수의 장사 후에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는 주를 사랑하는 헌신한 여인들로 마친 셈이다. 살아 있는 예수의 머리에 부을 매우 값진 향유와 예수의 죽은 몸에 바를 향품이 예수의 죽음을 위한 물품으로 쓰임을 받는다. 그런 면에서 여인과 향유[향품] 예수의 수난 기사와 죽음을 감싸고 있는 1-2-1 수사법으로 마가복음이 얼마나 예수의 죽음을 돋보이기 위해 치밀하게 구성된 것인지 있다.

 

여인들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관정에 왔던 것처럼 주님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하려고 결심하여 무덤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가 근심에 사로잡혀서 어두움 속으로 달아났던 것처럼, 무덤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도망했다. 그들의 진정한 충성심에 의문이 던져진다. 마가는 그들이 천사들의 명령, “가서, 말하라”는 말씀을 무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요한 부활의 증거자들로 떠오른 사실은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진리성을 기묘하게 입증한다. 후기 유대인의 법은 예외적 상황들에서 어떤 예외의 진리를 입증하기 위하여  명의 남자 증인들을 요구했고,  법률이 유대 사회에서 1 세기에도 여전히 적용될  있었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믿음에 결정적인 사건을 위하여 존중할  있는 사람들의 증거를 원했을 것이다( 4:13 비교하라). 그런데 부활의 첫 증거자가 여인들이다. 

 

이것은 1세기 때에는 음모론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유대 법정은 여성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의적인 은폐 공작이 있었다면 베드로나 요한, 또는 내세우기 좋은 니고데모를 사건 전면에 세웠지, 여성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들은 부활 사건 후에 쓰였기 때문에, 저자들은 그런 좋은 모양새를 수정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그들이 평범한 사실을 기록하고자 것이 아니고, 전설을 꾸며내려 것이라면.

 

정말로 부활 사건이 음모라면 번째 증인들의 이야기도 좀더 깔끔하게 정리했을 것이다. 입은 사람이 둘이었는가, 아니면 하나였는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무덤지기로 착각했을까? 그녀는 혼자였나 아니면 살로메와 다른 마리아와 함께 있었나? 무덤을 발견한 이야기는 숨가쁘고 산발적이다. 마태는 여인들이무서움과 기쁨으로무덤을 떠났다고 말하고(28:8), 마가는몹시 놀라 떨며무덤에서 도망하였다고 말한다(16:8). 예수님의 출현도 모든 의심을 불식시킬 만큼 극적이고 계획된 출현이 아니다. 초기의 기록들을 보면 엉성하고 기묘하고 혼란스럽다. 음모론이 맞는다면, 음모자들은 장차 역사의 분기점이라 주장할 만한 사건을 좀더 깔끔하게 정리해서 기록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변증적인 태도로, 중심 주제를 논리정연하게 증명하는 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충격적으로 비집고 들어온 사건으로 본다. 많은 제자들도 예상치 못한 당연하다. 번째 증인들은 누구라도 보였을 법한 반응을 보였다.

 

웬 음모론?

 

물론 여기에 음모가 꾸며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음모는 제자들이 꾸민 아니라, 무덤에 당황한 권력자들이 꾸민 음모였다. 그들은 무덤이 막혀 있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시체를 보여 줌으로써 엄청난 소문을 가라앉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힌 무덤은 이미 열렸고 시체는 사라졌다. 따라서 공식적인 계략이 필요했다. 심지어 여인들이 소식을 전하러 달려간 동안, 군인들은 알리바이를 조작해서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피해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예수님의 무덤을 밖에서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적의 유일한 산증인이었다. 마태는 땅이 진동하고 천사가 번개처럼 환하게 나타나자,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 떨며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날 오후에 부활을 직접 목격한 군병들은 제사장이 지어낸 거짓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것이다(28:13). 알리바이에는 분명한 허점이 있다. (어떻게 군병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고 돌을 움직일 있었을까? 그리고 군병들은 잠들어 있었다면서 어떻게 그들이 제자인 알았을까?) 하지만 최소한 군병들을 어려움에서 빠져나가게 해주었다.

 

예수님이 살면서 겪었던 다른 모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관해서도 사람들은 역시 대조적인 반응들을 보였다. 믿은 자들은 변화되었다. 소망과 용기를 얻고 나가 세상을 변화시켰다. 믿지 않은 자들은 강력한 증거를 무시할 방도를 찾았다. 예수님도 정도는 이미 예견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16:31)

 

여인들의 놀람과 두려움

 

마가의 종결부분의 결론은 여인들이 무덤에서 떠난 일과 그들의 두려움의 성격에 관해서 의문점을 일으킨다. 그들이 두려움과  기쁨을 가지고 무덤으로부터 빨리 달려가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있겠지만( 28:8처럼), 마가는 그들이 모순된 침묵 속에서 달려갔다고 기록한다. 그들이 도망하고 침묵한 것이 무기력과 불순종 때문인가, 아니면 긴급함과 경외심 때문인가? 그들의 침묵을  소식의 깜짝 놀랄 만한 성격으로 인한 일시적 무능력으로 이해해야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범한  다른 비참한 실패의 서글픈 사례로 이해해야  것인가?

 

일부 사람들은 여인들의 침묵이 하나님의 능력과의 조우로 인한 놀람의 결과로 묘사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 주었다”(4:11)라고 말씀하셨지만, 가끔 비밀의 경이적인 성격은 너무나 커서 이해하기 어렵다. 여인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현존과 행위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경외심( 2:11 보라)–마가의 결론을  엄격하게 만드는 설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은 너무나 놀라워서 사람이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없고, 여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이 무덤으로부터 도망쳐 나올 , 그들의 긴급한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길에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10:4; 참조 왕하 4:29). 

 

마가복음서 주석에 대한 미니어(Minear) 시적 결론은 여인들의 도망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가장  요약 해주고 있다.

여인들의 놀람(5) , 놀람, 두려움, 도망, 침묵으로 변한다.  모든 것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사건에 대한 인간의 적합하고도 정상적인 반응으로 간주되었다. 선지자들은 모두가 이러한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했다(예를 들면,  6).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말로 표현할 수없는 무능력을 체험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실체를 강조한다. 도망(예수의 포박 당시에 도망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도망임) 하나님의 임재의 감당할 수없는 성격을 강조한다.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어울리며, 하나님 말씀의 엄청난 충격에 어울린다. 그분이 나타나실  누가   있겠는가? 그분이 말씀하실  누가 감히 말할  있겠는가? 그가 사명을 주실  누가 조용히 있을  있겠는가? 여인들은 최소한 그럴  없었고, 아마도 제자들도 자기들의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하는, 여인들로부터 메시지를 전해 들었을  그렇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해석은 아니다. 인간들은 마가복음서 내내 두려움으로 반응한다. 제자들은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압도하는 능력을 보았을  두려움에 압도당했다(4:41). 거라사인들은 군대귀신을 쫓아내고  사람을 온전한 정신을 갖도록 회복시켜주자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했다(5:15).  여인이 단순히 그분의 옷자락만을 만짐으로써 자기의 질병이 치유되었을  두려워했다(5:33). 제자들은 예수가 바다 위로 걸으시고(6:50) 변화되시고(9:6) 십자가를 지시는 자신의 운명을 향하여 서슴지 않고 행진해 나가시는 (10:32) 보았을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인간들은 복음서 이야기 내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귀가 막히고 말을 못해 했다. 어찌하여 우리는  여인들이 무엇보다도 가장 능력 있는 하나님  행위,  예수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과 마주쳤을  이와 동일한 반응을 예상하지 않아야  것인가?

 

유얼(Juel) 여기에  아이러니 있음을 지적한다. “주를 따르는 자들이 마침내 예수에 관해서 말하도록 들었을 ,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오랫동안 침묵으로 지켜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여인들이  즉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오랜 동안 아무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의 침묵은 제한된 기간뿐이다. 복음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엄청난 이적들을 잠잠히 간직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별한 일은 감추어질  없다.

 

다른 한편으로, 여인들의 두려움을 부적절한 반응으로 해석할  있고, 그들이 혼미하여 침묵한 사실을 불순종으로 해석할  있다. 주님의 변화에 대한 베드로의 잘못된 반응이 두려움과 연결되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9:6).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따라 가는 제자들의 두려움은 주님의 개별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약했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시다(9:32; 10:32). 제자들이 예수의 포박 당시에 달아날 (14:50-52), 멀리서  분을 따라갔을 (14:54),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부인했을 (14:66-72) 실패했던 것처럼, 여인들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멀리  있음으로써 실패했다(15:40). 그리고 그들은 무덤에서 도망하고 기쁜 소식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실패한다.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은 닫힌 마음의 불신앙이 아니다. 그러했다면, 복음의 능력을 소진하였을 것이다(6:3-5 보라). 오히려  원인은 순수하고도 단순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십자가를 지기 전과 부활 후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 부활은 이제 모든 사람이 올바르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쟁(13:7), 핍박(13:9), 배반(13:1243), 환난(13:19), 속임(13:21-22) 계속 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가 약속하셨다(13:13). 많은 사람들이 여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두려움을 경험할 것이며, 침묵 가운데 숨으 려고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을 잃는 것을 배워야할 것인데 이것은 자기들의 두려움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의 시험 이야기에서 종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결이 없다. 독자는 결과에 대해서 듣지 못한다. 예수는 광야에 남아계시고 천사들의 수종을 받는다.  다음 단락을 시작하는 장면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독자는 종결을 잠재의식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셨고,  무덤을 통하여 죽음을 정복하셨다.  다음 장면은 갈릴리에서 회합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데, 거기서 다시 승리의 복음이 울려 퍼질 것이다. 이번에는  크고 결정적인 승리가 있을  이다.

 

공개적인 선포를 명령하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이 하려고 하시는 일을 알리는 하나님의 사자로 시작하고(1:2-8),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알리는 하나님의 사자로 마친다. 사자들의 옷이 묘사되어 있다. 선지자의 거친 털옷은 천사의 흰옷과 대조가 된다. “ 장면에서 나타나 있다. 장면에서는 길이 준비되어야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길이 준비되었고 제자들이 좇아서 예수가 그들 앞에 가신 갈릴리로 가야한다. 

 

그러나 16장에서 천사들의 메시지는 선지자 요한의 메시지보다 중대하다. 신적 존재만이 정상적인 인간의 체험과 지식 너머에 있는 신적 진리를 발표할 있기에, 천사는 무덤의 의미를 설명한다. 천사는 또한 여인들이 새로운 추구를 있도록 조정한다.

 

미니어(Minear) 진술한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을 어떤 임무에 가담케 하지 않는다면, 부활의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천사의 인사는 그들이 올바른 무덤에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들은 실수하지 않았다. 천사는 그들이 찾는 자를나사렛 예수”(1:24; 10:47; 14:67), 십자가에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밝히고 있다. 예수 부활에 대한 그의 간결한 선언, “그가 살아나셨다 그의 박히심에 대한 마가의 묘사와 유사하다.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박다”(15:24). 부활은나사렛이란 이름과 연관된 경멸적인 표현과 십자가에 박히는 것과 연관된 불명예스러운 표현을 지워 버린다. 하나님은 예수의 비참한 지상의 운명을 역전시켜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그의 예고를 이루신다(8:31; 9:31; 10:34).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활동해 오셨고, 그의 부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인들이 매달리고 얼싸안도록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쁨의 재회로 끝나지 않는다. 부활이 세계에 퍼져나가야 하는 복음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갈릴리로 가야하는 제자들에게로 가야한다. 명령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그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들은 처음 명령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박히심과 부활은 하나의 전환점이다. 이제는 침묵하거나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다(9:9 보라). 마커스(Marcus)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전에 예수가 그러한 사건들을 비밀에 부쳐두라고 명령하셨기에 공개적인 선언이 불순종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공개적인 선포를 명령하고 있으며, 비밀에 부쳐 두는 것이 불순종이다.”

 

갈릴리로 가라

 

무덤 안에 있는 흰 옷을 입은 청년이 여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할 때에, 마가는 유난하게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라고 한다. 이 명령에서 베드로가 특별히 언급되는 것은 일종의 인클루시오를 형성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 이름으로 언급되는 번째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다(1:16; 16:7). 부활은 죽음과 멸망을 무효화시키며, 죄를 무력화시킨다. 베드로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언급은 그의 믿음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전히 회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는 제자들의 실수가 얼마나 크든, 그들의 잘못이 얼마나 많든 간에,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분이 너희보다 먼저 가고 계신다 소식은그가 예기 계시지 않다 말씀만큼 중요하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단순히 '앞서서 가셨다'는 사실보다는, 돌봄과 섬김을 나타낸다. 일찍이 예수는 그들 앞서 갈릴리로 것이라는 약속을 목자 이미지와 연결시켰다(14:27-28).

 

막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막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는 자기 양무리를 먹이시고(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오병이어의 기적이 이어진다) 그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놓으셨는데, 이것이 그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주께서 부활하시면서, 그는 그들을 우리 안으로 다시 모으실 것이다. 지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가 놀란 제자들을 앞서 가시면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해 가셨던 것처럼(10:32), 부활하신 예수는 여전히 그들 앞서 가시면서 교회를 인도하신다.

 

마가복음 14:27-28 바로 다음 사건이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언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이야기한 베드로의 회복됨과 긴밀하게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보다”(see)라는 동사(“너희가 그를 것이다”) 부활보다는 재림(파루시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13:26; 14:62 보라). 그들은 명령을 제자들(그리고 마가의 독자들) 갈릴리에 모여서 종말론적 절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마가는 갈릴리를 파루시아와도 연결시키지 않는다. 14:28 있는 갈릴리에 대한 언급은 분명히 그것을 파루시아와 연결시키지 않고, 예수의 부활과 연결시킨다(“내가 살아난 후에”). 그러므로보다라는 동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20:18, 25, 29; 고전 9:1).

 

갈릴리로 가라는 명령은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운동의 중심지가 아니다. 제자들의 미래는 다른 곳에 놓여 있다. 예루살렘은 열매 없는 멸망의 성전이 있는 도성, 복음에 강력하게 적대하는 요새, 예수를 야만적으로 처형한 곳이 되었다. 마가복음서에서, 갈릴리는 부르심, 믿음, 동정, 치유 능력, 권세의 장소가 되었다. 예수가 계실 갈릴리로 돌아감으로써 제자들은 출발을 하게 된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모여서, 제자의 길을 다시 시작한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물리적으로 예수를 것이지만, “보는 영적인 목과 관련이 있다(2:5; 4:12; 8:18; 15:39)–이것은 복음서 이야기에서 자주 제자들을 곤란케 했던 부분이다. 또한 그들은그분의 정체에 대한 참된 통찰력을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그분을 것이다.” 제자들은 꾸준히 보아도 알지 못하였다고 책망을 들어왔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의 삶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그를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제자들이 완전히 이해할 있도록, 그들의 소경됨을 치유하실 것이다. 예수의 생애 마지막 주간 동안에 있었던 제자들의 초라한 행동은 그들이 죄인임을 드러내주었다. 이제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면서, 하나님의 사탄과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를 선포하는 백성으로서 예수는 그들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그들의 눈과 귀가 열릴 것이다. 그들은 길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것이다.

 

마가복음서의 결론

 

가장 초기의 믿을 만한 필사본들 가운데는, 마가복음서가 8절로 끝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중단은 수세기 동안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복음서의 갑작스러운 종결에 들어있는 문학적인 재주에 관심을 두고, 예술적 효과를 인정한다. 어떤 것들은 표현되지 않을 보다 의미심장해 보이며”, 빠뜨린 것들이표현을 보다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요컨대, 종결부분은 독자들이 반응하도록 자극한다. 우리는 복음서를구성한 시기에는 아닐지라도, “이야기 시기 제자들이 예수와 재회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복음서는 결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복음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마가가 여태까지 제공한 단서에서 서술하지 않은 사건들을 우리가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결부분을 제공했을 ,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무엇이 일어났는가?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는 예수에게로 가야하고, 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해야 아니라, 전체 이야기를 시작부터 말해주어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무덤은 비어있지만, 1세기 다른 사림들은 사실로부터 아주 다른 결론을 이끌어냈다. 마태는 당대의 지도자들이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는 소문을 전하기 시작했다( 28:11-13). 그러므로 무덤은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가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은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천사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선포한다. 믿음이 부활의 선언하는 것과 그분을 만나러 가는 것에 놓여 있다. 이것이 우리를 보다 중요한 문제로 이끌어간다. 그는 어디에 계시고, 우리는 어떻게 그를 발견할 있는가?

 

 

 

참조:

1 NIV 적용 주석 - 마가복음, 솔로몬 발간

2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포이에마 발간

3 부활을 살다, 유진 피터슨, 복 있는 사람 발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