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머시 켈러의 《살아있는 신》에서 발췌
13 부활의 실재
부활과 불멸
...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을 텅 비어 있었고, 수백 명의 목격자가 부활한 예수를 봤다고 주장했다는 아주 강력한 증거는 존재한다. 라이트의 말마따나 여기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예수가 정말로 부활했다는 증거는 물론 아니지요. 예수를 따라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그가 부활했다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었을 테죠. 그가 부활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누군가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진지하게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다른 몇몇 사람들은 좋은 의도에서 그렇다고 입을 맞출 수도 있었을 겁니다.”
... 어느 시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으로 보든 간에, 한 개인의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의 부활이란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도 역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물질계를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죽음은 물질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비극으로부터의 자유이었다. 예수가 살아있을 즈음의 많은 유대인들은, 언젠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새롭게 하고 모든 고통과 죽음을 없애, 모든 정의로운 인간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날이 오리라고 희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르면, 부활은 완전히 새로워진 온 누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나머지가 질병과 부패와 죽음의 짐을 지고 계속 허덕이고 있는데, 한 개인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생각은 모두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1세기의 유대인에게 “아무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대꾸를 들었을 터이다. “너, 돌았구나! 말이나 돼? 질병과 죽음이 끝났다는 거야? 이 세상에 진짜 정의가 자릴 잡았다고? 늑대가 양떼랑 함께 누웠다고? 웃기고 있군” 그리스인에게 그런 것처럼 유대인에게도 개인의 부활이란 아이디어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부활에 대한 회의론자들은 여러 해를 두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환각 상태였을지 모른다든가. 예수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는 건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내놓았다. 이런 말은 유대인인 추종자들에게 스승의 부활이 ‘상상가능한’ 것이었다는 가정, 그들의 세계관에서 부활도 하나의 옵션이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그 가정은 틀렸다. 또 다른 이들은 음모 이론, 즉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가 살아있다고 주장했다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런 이론 뒤에는 다른 유대인들이 개인의 부활 가능성을 믿을 거라고 제자들이 기대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당시의 사람들도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나 꼭 마찬가지로 (이유야 달라겠지만) 육신의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1세기경에는 자칭 지도자들이 처형을 당했던 다른 메시아 운동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실망한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영웅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노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던 것이다. 부활은 사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통치세력의 처형으로 지도자를 잃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유대의 혁명분자들에겐 두 가지 옵션이 주어졌다. 혁명을 포기하거나 다른 지도자을 찾거나, 원래의 지도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햐 옵션이 아니었다. 물론, 그가 정말 부활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메시아를 자처했다가 예수와 똑 같은 종말을 맞앗던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패배가 아니라, 영광스런 승리란 결론을 내렸을까?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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