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마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세례 요한은 생면부지의 예수를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예수에게 세례 베푸는 것을 사양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미 앞에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말했던 세례 요한이기에 14절의 말,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할 때, 세례 요한은 예수의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위엄에 대한 순종과 그의 신학적인 당위성 있는 주장으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오늘 본문은 “왜 예수는 세례를 받으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왜 그 일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학습을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당연한 것이지만, “죄 없으신 분이시고 회개할 것이 없으신 분이신 예수가 이 세례를 받으신다?”, 이것은 의아로운 일입니다. 더욱이 이것이 바로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신 방식이었다면 더 이상합니다.
예수는 그의 사역의 시작을 세례로 정하였습니다. 세례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몇 안 되는 중요한 사건의 하나입니다. 예수는 일반 대중과 동일하게 요단강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순복’을 표현한 이 행동으로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물론 모든 사람의 주목을 한눈에 받았던, 불을 내뿜는 선지자 요한의 뒤를 이어, 먼저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초기 사역을 시작하지만(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의 메시아적 사역이 두드러집니다), 자신을 세례 요한과 동일시하는 않습니다. 오히려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 요한에게 나아온 낙오된 순례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는 스스로 ‘나는 그들 중 하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1세기 유대인은 '죄'에 대해 우리처럼 즉각적으로 개인적 실패를 떠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성경(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죄는 곧 국가적인 죄를 의미했습니다.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거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공급된 음식에 불평하거나 모세의 리더십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소홀히 예배드리는 죄 말입니다. 물론 개인의 죄도 이 죄에 포함되지만, 국가적인 영향력이 죄를 두드러지게 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는, 다윗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했을 때, 당연히 그의 개인적인 죄이지만 곧 이스라엘 국가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골리앗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왕으로서 그의 영광은 곧 국가의 영광이었습니다. 같은 원리로 그의 죄는 국가의 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큰 가족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의 명예를 함께 지키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외부 세계를 직면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수치스런 짓을 했다면 나머지 사람도 수치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공동체적 위기를 느끼며 요한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분명히 그렇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죄가 죄 된 국가의 운명과 뒤섞여 있음을 보았습니다. 당시의 모습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주신 국가적 정체성과 비전을 성취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새롭게 돼야 할 필요를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이스라엘에 요청한 회개였습니다. 그는 개인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초점을 두고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같았습니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너희 중 일부가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경고했습니다. 한 민족으로 선택받았으니 한 민족으로서 심판받을 거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차원의 방향 전환을 해야 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어떤 개인은, 즉 아합, 이세벨, 므낫세 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했습니다. 또 어떤 개인은, 즉, 룻, 호세아, 다니엘 등은 귀감이 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일부 사람은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죄로 말미암은 수치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포로로 끌려감으로써 심판받았습니다. 모두 고난을 겪었습니다. 모두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죄를 생생히 느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분은 개인적인 죄가 아닌 이스라엘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과 온전히 동일시하였기에, 그들의 죄까지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와 이스라엘의 미래가 하나임을 선포하는 셈입니다.
2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구속 사역을 세 가지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속죄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에서 꺼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예수가 제사장이 되어, 계속하여 죄인 편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받음, 달리 말하면, 예수의 수세 사건과 관련하여, "모든 의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전체 이야기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출애굽으로 돌아가 봅니다. 쉽게 구원을 생각하여,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꺼낸다, 이것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 곧 출애굽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꺼내는 일입니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야 합니다. 그 일에 모세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세는 다름아닌, 이스라엘인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갑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죄인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설입니다. 중요한 초점은 인류의 대표이었던 아담이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의 죄이었는데? 하나님이 금하신 첫 번째 금령(禁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세기 2장 17절)는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많이 혼동해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복을 주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이런 금령, 뻔히 인간이 따 먹을 줄 알면서도 이런 위험천만한 금령을 준단 말입니까? 이게 창세기를 읽으면서 좌절케하는 질문입니다. 이 금령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아, 복을 주려고 너를 창조했다. 이 지어진 세계를 너와 함께 복되게 만들고 싶구나. 너는 나의 동반자다. 이게 나의 기쁨이요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런데 너는 피조물이다. 나와의 이 언약 안에서만 너의 복이 보장된다. 네가 내 약속과 보호 안에서만 이런 영광스런 일을 함께 이룰 수 있단다. 나를 떠나 너 홀로 서면 너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내가 준 모든 복도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요, 생명도 그 끝을 보일 수 밖에 없단다. 너는 창조주가 아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이 곳에 두마. 이것을 볼 때마다 나와의 언약의 관계 안에서 얼마나 복 되게 살지를 마음껏 꿈꾸며 펼쳐라. 잊지 마라. 내 사랑하는 존재야, 제발 잊지 마라. 너는 내가 너에게 준 나의 형상으로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너를 복 되게 하려고 그랬다. 너의 자유의지가 영광이 되게 하라. 너의 자유의지가 너를 파멸케 하지는 마라. 이것 하나만 잊지 마라. 나는 너의 창조주요 너는 피조물이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이 언약의 말씀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죄를 낳았습니다.
자, 이제 예수가 새 시대를 열려고 합니다. 예수가 역사 안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이제 제2의 아담인 예수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꺼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는, 이 땅에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을 재창조라고 부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는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 치료하고 고쳐내는 새로운 대표자로서 우리 인류와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만약 속죄 제물로서만이라면 그는 아기로 태어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언제든 신의 모습으로든 신 자체의 모습으로든 등장하여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쳐도 됩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새로운 인류의 대표가 되어야 하므로 우리와 같아지기 위하여, 무한(無限)인 존재가 유한(有限)한 존재로 와야 했습니다. 인간으로 오고, 그래서 여기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나고 성장함으로써 우리와 온전히 같아지어 비로소 대표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중요한 용어, ‘대표 원리’라고 합니다.
불가피하게 사도 바울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로마서 5장 12-14절입니다.
롬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대표자’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아담과 예수가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측면에서, 인간은 죄를 짓지 않아도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오직, 죄의 결과, 곧 죄에 값을 치루는, 죄값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죄인된 신분이 되었고, 죄를 짓지 않아도 사망 권세에 갇힙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러면 예수가 왔다는 것은,
롬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죄인이 되어,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어냈듯이, 예수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의로운 행동으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새로운 인류를 만듭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온 그가 이제 예수의 가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국과 영원한 왕권이 시작됩니다.
히브리서 2장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히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는 것보다(이것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를 대표하고 이해하고 우리와 같아져야 하는 것으로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 큰 내용이며 이제 그 왕권이 온전히 새워지기 까지 그의 나라 백성으로 온전하게 살아내는 일에 오늘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
마태는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스스로 창조한 틀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아주 분명하게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서문 격인 1장에서, 족보의 바로 다음 내용을 돌이켜 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의 아기를 “예수”라 부르라고 전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여호와(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함부로, 아니 결코 부르지 않지만, 그들은 ‘아도나이(나의 주)’라고 합니다. 굳이 그들의 방식으로 읽자면, ‘야훼’ 또는 ‘야웨’가 더 자연스럽습니다. ‘지저스’ 보다 우리말 ‘예수’가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가 구원하신다”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어지는 마태의 논평은 여기에 다른 각도의 내용을 채워 넣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성취하려는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을 것이다. 이 말을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이다.”(의역, 마태복음 1장 22-23절)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기 백성들과 동거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처한 곤경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오셨음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거 유대의 용어를 쓴다면, 그 곤경은 특별히 그들이 여전히 겪던 “포로 상태”, 이방 나라들에게 침략 당하고 지배를 받는 곤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마태 이야기 틀의 다른 쪽 끝을 봅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그러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라.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
그 말은 그 누구의 기준에서 들어도 놀랄만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마태도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는 “임마누엘” 약속이 메아리쳐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예수가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서 돌아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이제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 본문 수세 사건에서 예수의 말씀과, 곧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장엄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