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27: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1절, 한글 번역 성경에는 가단히 “이에”라고 하였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극적인 표현 ‘카이 이두’(“그리고 보라!”)을 사용하여, 51-53절에 이어지는 특별한 사건들이 예수의 죽음의 직접적인 결과임을 암시합니다. 또 하나의 (부활의) 결과로 이어질 28장 2절의 “지진”은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 특히 심판에 대한 잘 알려진 상징이며, 45절의 특이한 어둠에 이어짐으로써 (45절에서 살핀 바와 같이, 지진과 어둠은 암 8:8-10에 함께 나타납니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것은 이어진 52절의 무덤이 열린 배경을 제공하며, 성소 휘장이 어떻게 찢어졌는지에 대한 설명도 될 수 있습니다. 마태가 단일한 절 안에서 동일한 동사를 두 차례(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바위가 터지고) 사용한 사실로도 확인합니다. 그러나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은 신현에 관한 전통적 언어에 해당하지 않으며, 예수의 죽음이 의미하는(또는 성취한) 보다 구체적인 상징임이 분명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이 휘장이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 전체를 가로막고 있는 바깥 휘장)인지 아니면 지성소를 성소의 바깥쪽 방과 분리하는 실내 휘장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전자의 휘장이 찢어진다면 제사장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는(아마 마태도) 독자들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가시적 상징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는 점에서 이 바깥 휘장을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내 휘장은 제의적 분리에 대한 강력한 상징을 제공합니다.
이처럼 높은 휘장이 아래가 아니라 위로부터 찢어졌다는 사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대적들의 조롱이 있은 후 특히 “성전의 사악한 무리”에 대해 예수를 신원한 “신적 응수”에 해당합니다.
해석가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상징적 의미를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이 포함됩니다. (1)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 및 성전 제의가 필요하지 않다. (2) 예수가 예언한 다가올 멸망에 대한 상징이다(따라서 40절에서, 성전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조롱한 것에 대한 신적 응수다). (3) 예수의 죽음이나 다가올 성전의 멸망에 대한 비통함의 상징(왕하 2:12에서처럼)이다. (4) 지금까지 휘장으로 상징되는 제의적 분리에 의해 닫혀 있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히브리서를 통해 서술된 바와 같이) 상징이다. (5) “예수의 죽음에 의해 유발된 신적계시”에 대한 종말론적 징조다.
실제로 이처럼 다양한 상징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1)과 (2)와 (3)은 자연히 함께 가며, (4)는 (2)를 긍정적 관점에서 조명한 것입니다. (5)에 제시된 계시는 (4)처럼 “에덴동산 이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접근”입니다. 어떤 요소를 강조할 것인지는 마태의 성전(그리고 성전의 대체에 관한) 신학에 대한 해석가의 총체적 통찰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앞서 제시한 감람산 강화에 대한 통찰력에 비추어 볼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권위가 옛 성전에 초점을 맞추었던 체제(예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로부터 신원함을 받은 인자에게로 넘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옛 제의적 시스템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52-53절, 다른 복음서 기사에는 이곳에 제시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평행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역사적 사고를 가진 해석가들에게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점을 남겼습니다. 마태는 무덤이 열린 것과, 이틀 뒤 죽은 자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사실과,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사기가 찍은 그날의 정확한 장면에 대해, 그리고 죽은 성도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 사실이 어떻게 역사적 자료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는지에 대해 추측만 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수의 기적과 관련하여 마태는 우리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거나 경험적 회의론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상징적 의미를 위해서만 전달한다고 봅니다. 일종의 환상이라고 설명하면 그래도 현대인의 머릿 속에서 이해가 가능합니다.
“자던 성도”는 경건한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태가 최근에 죽은 동시대인을 염두에 두었는지 예루살렘 부근에서 죽은 구약 성경 시대의 잘 알려진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에 관한 구약 성경 여러 본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제시된 곳은 다니엘 12장 2절과 (아마도) 이사야 26장 19절일 것입니다. 이곳의 마태의 어법은 특히 에스겔 37장 13절(이곳에서의 부활은 개인의 사후 생명에 대한 약속이라기보다 민족적 부활에 대한 은유이지만)을 상기시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겔 37:7의 지진과 같은 이미지에도 주목하여 읽어야 합니다). 마태는 분명히 이 불분명한 백성의 부활과 예수의 부활을 연결합니다(그들을 풀려나게 한 지진은 예수가 죽는 순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마태의 어순은 그들이 예수가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해석이지만) 즉시 나왔지만 그때까지 성 밖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게 합니다. 어느 쪽이든 내러티브의 어색함은 남지만,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부활 후에”라는 순서에 더욱 주목해야 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의 부활이 먼저이며, 그들의 부활은 그 결과라는 것입니다(참고, 고전 15:20_23; 살전 4:14).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예수의 빈 무덤을 보여 줄 28장 2절의 두 번째 지진과 연결하는 것이 더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의 부활과(또는) 나타남을 지진 후 이틀 뒤로 연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을 이곳에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부활을 예수 자신만의 부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락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열쇠로 보았음을 말해 줍니다.
죽은 자가 인자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부활 사상은 요한복음 5장 25-29절을 참고하라. 본문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에 대해 “오나니 곧 이때라”라고 말씀한다. 올브라이트와 만(351)은 마태복음의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 대한 “각색”으로 봅니다.
54절,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마태가 앞서 십자가의 예수를 지키는 자로 묘사한 “군병들”(36절)은 여기서는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증인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마태가 다른 군병들과 함께 백부장을 포함시킨 것은 “두세” 증인을 제공함으로써 증언을 유효하게 합니다(18:16).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예수에 대한 조롱을 포함하여 그 후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 들었습니다. 마태가 이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유일한 사건은 지진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곳에서 변화산의 초자연적 현현에 압도된 제자들에게(17:6) 사용한 것과 동일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마태가 덧붙인 “그 일어난 일”은 구체적으로 지진과 연결된 사건, 즉 휘장이 찢어진 것과 죽은 자의 부활을 가리키지만, 역사적으로 말하면 골고다에 있는 군병들이 성소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볼 수는 없으며, (마태도 알고 있겠지만) 부활한 자들도 예수가 부활한 후에야 나타날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의 이 구절은 십자가에 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 특히 예수가 큰 소리를 지르신 것과 죽으신 방법(“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라는 마가의 어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진은 그들의 두려움을 설명하지만, 그들의 “신앙고백”을 초래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및 죽음에 관한 시나리오 전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은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더 다가가기 쉬운 개념입니다. 그리스-로마에서 종교적 신들은 종종 인간사에 연루되며, 남신은 인간(여자)을 통해 많은 자녀를 두기도 합니다. 탁월한 자에게는 신이나 반신의 속성이 더해졌으며, 로마 황제에게는 “신의 아들”이라는 공식적인 칭호가 더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 군병들에게 이 구절은 예수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지금 막 치욕적인 죽음을 당한 사형수에 대해 이러한 고백을 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지키고 있던 그들은 유대 백성은 물론 종교 지도자들까지 나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예수에 대해 조롱하는 것(40, 43절)을 들었으며, 그것이 유대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주장인지는 잘 모르지만, 조롱하는 자들보다 예수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급격한 방향 전환을 나타냅니다. 이제 그들은 앞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던 것(27-31절)이 잘못되었음을 안 것입니다.
군병들이 어떤 의미로 이러한 고백을 했든, 이 선언은 결정적인 신학적 모멘트가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두 차례나 선언하셨으며(3:17; 17:5), 귀신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4:3. 6; 8:29).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고(11:25-27; 17:5; 24:36) 종종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으며, 적어도 두 차례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암시를 주었습니다(21:37-39; 22:42-45). 제자들은 위기의 순간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으며(14:33. 이곳과 매우 유사한 선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이 호칭을 사용하여 요약하였습니다(16:16). 그러나 예수가 재판을 받으실 때까지 제자가 아닌 누구도 예수에게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호칭은 산헤드린 청문회에서 예수를 정죄하는 근거로 제시되며(26:63), 유대인이 예수를 조롱하는 수단으로 사용됩니다(27:40, 43). 그러나 이제 믿음의 공동체 밖 백성이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고백하며, 조롱은 역전됩니다.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새로운 교회(‘에클레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마태의 메시지를 강조합니다. 백부장과 그와 함께한 자들은 마태복음 앞부분에서 보았던 백부장(8:5)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동서로부터 와서 천국의 유대 족장들과 함께 할 많은 사람을 대표합니다(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