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8:16-20은 부활 내러티브의 결론이면서 마태복음 전체를 종결합니다. 마태복음의 주요 주제가 28:16-20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1) 예수의 권위(7:28;1127;21:23~27), (2) 예수에 대한 믿음(8:10, 13; 9:2, 22, 28, 29; 15:28; 17:20; 21:21, 22; 6:30; 8:26; 14:31; 16:8), (3) 예수: 하나님의 함께하심(1:23; 18:20; 26:29), (4) 교사 예수(4:23; 5:2, 19, 21-48; 7:29; 9:35; 11:29; 17:5; 23:8, 10; 24:35), (5) 구원을 제공(2:1~12; 4:14~16; 5:13시4; 8:11~12; 10:18, 22; 12:17~21; 13:31~32, 38, 47; 15:21~28; 22:9; 24:14, 31; 25:31~32; 26:13; 27:54), (6) 이스라엘의 소망(8:11~12; 21:43), (7) 제자들의 사명 (4:19; 5:13~16; 9:35~10:42; 26:13).
28:16~20은 구원 역사가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면서 예수의 사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즉 역사의 서막입니다.
16절,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지정하신 산에 갑니다. 여자들을 통해서 천사들과 예수의 명령을 전해들은 제자들이 갈릴리의 한 산에 모입니다. 이 곳에는 자살한 가룟 유다(27:5)는 제외됩니다. 갈릴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천국 백성을 부르신 곳입니다(4:23~25). 제자들은 이곳에서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4:18). 산의 구체적인 명칭은 나오지 않습니디만, 마태복음에서 산은 하늘의 뜻이 주어지는 계시의 장소입니다(5:1; 8:1; 17:1). 이는 구약의 시내산이나 호렙산이 차지했던 역할과 비슷합니다. 만일 20절의 “명령한 모든 것”이 산상설교와 관련된다면, 이 산은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전하셨던 곳일 수 있습니다(5:2; 7:28~29).
그들이 예수를 만나 뵐 때 그들은 예수를 경배합니다.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제자들은 예수가 부활한 사실에 대해 며칠을 생각했을 것이며, 예수를 만나 뵐 날을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구절은 더욱 놀랍습니다. 혹자는 이곳에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제자들이(사도행전 1장에 함께 한 약 백이십명 정도), 심지어 오백 명까지(고린도전서 11장에 등장하는 부활의 증인들 오백 명) 있었다고 추측합니다만, 문맥상 사실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마태는 그곳에 있는 사람을 열 한 제자로 제한하며, 열한 제자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일 만한 어떤 그룹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의심하다”라는 단어는 “의심하다”, “주저하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는 “주저하다” 또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의 의미를 선호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 오직 한 차례(14:33) 나타납니다.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자연의 힘에 맞서 담대함을 상실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본문에서도 베드로의 “망설임”은 “경배”(14:34, “절하며”)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적인 의심보다 두 마음으로 인한 실제적인 불안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여기 17절에서도 어떤 제자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예수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였을 수 있지만(다른 공관복음에서 제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과 같이, 특히 도마), 마태복음에 기록된 다른 부활 현현 기사(9-10절)에는 불분명함이라는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며, 더구나 그들은 예수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더구나 이 구절은 예전에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달라진 새로운 상황에 처한 그들이 예수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변모를 목격한 세 제자가 심히 두려워하며, 당황했던 장면도 이 장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17:1-7). 그러나 본문에는 그 이상의 요소가 함축됩니다. 열한 제자가 예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를 겟세마네에 두고 달아날 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자신이 버린 주인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부활한 예수를 경배하려는 마음과 당황스러운 만남을 피하려는 마음이 교차하는 인간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예수께서는 18-20절에서 네 번에 걸쳐서 “모든”을 사용합니다. “모든 권세”(18절), “모든 민족”(19절), “명령한 모든 것”(20절), “모든 날들”(20절, 문자적 번역). “모든”은 예수의 권위가 미치는 영역을 뜻합니다. 28:18은 다니엘 7: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의 암시입니다.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 할 영원한 왕권이 될 것입니다.
다니엘 7:14의 장면이 암시된 것은 부활의 의미가 하나님의 신원하심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수난 내러티브와 연결해 보면 부활은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겪은 예수를 신원하신 사건입니다. 죄 없이 고난받는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장면은 유대인들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원하심”은 권세를 주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하늘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고난받은 종으로서 그의 뜻을 성취한 것을 신원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고 심판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예수는 하늘에서 모든 권세를 받으신 점에서(단 7:13~14) 인자의 권위를 가지십니다. 그러나 19절에서 예수와 아버지가 함께 언급되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는 “유일한” 관계를 의미했으므로(예, 7:21; 10:32-33; 11:25-26; 12:50), 본문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태가 다니엘 7:13~14을 자료로 사용한다고 해서 이 구절에서 인자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배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인자의 권위로 명령하시는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하늘은 예수의 우주적 권위를 확증해 주는 영역입니다. 예수의 신적 권위는 하늘보좌에서 주어진 것으로 온 우주에 미칩니다.
예수는 11장 27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권세는 완전하게 진술된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11장 25절에서 “천지의 주재”라고 불렀던 아버지의 모든 권세를 소유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태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우리는 다윗의 왕적 계보(1:1-17)를 통해 도입된 왕권이라는 주제의 절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주제는 2장에서 동방 박사가 “유대인의 왕”을 찾아 나서고 헤롯이 정치적 위협을 받는 과정을 통해 발전하며, 메시아 되심과 관련된 언어적 발전과 함께 희미해지지만, 예수의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21:1-11)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됩니다. 이후 예수의 왕권에 대한 주장은 고소와 조롱의 대상이 되지만(27:11, 29, 37, 42),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현현 사건으로, 드디어 이 왕권의 진정한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지역 정치 이상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마태의 특징적 묘사에 해당하는 “인자”의 우주적 왕권입니다(13:41; 16:28; 19:28; 20:21; 25:31-34).
이제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우주적 권세는 이어지는 19-20절 명령의 본질적 기초이자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제자 공동체의 삶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의 권위가 미치는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제자들이 가야 할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이다. 모든 민족에게 제자들을 보내는 것은 24:14에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구원 역사의 순서상 28:19의 명령이 먼저이고, 24:14은 명령이 실행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부활 이전에 예수의 권위(7:29; 9:8; 11:27; 21:23)는 주로 이스라엘 안에서 행사된 반면(10:5 이하; 15:24), 부활 이후에는 권위가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예수는 목자로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고 하셨지만, 이제는 모든 민족이 회복되어야 하는 양이며 제자들은 목자의 동료로서 역할을 맡습니다. 또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한다는 점에서 1:1의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28:19에서 밝혀집니다. 다윗의 아들(1:1)인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음과 부활로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드디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아브라함의 소망을 이루고 계십니다.
19절의 주동사는 “제자를 만들라”입니다. 이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제자를 삼기 위한” 목적이라는 차원에서 제시됩니다. 민족들이 메시지를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의 사역 기간 중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요구한(가령 8:19-22; 19:21-22. 27-29) 것과 동일한 진정한 헌신의 반응을 보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의 구조는 “제자로 삼아”라는 명령형 속에 있는 주 동사 뒤에 제자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 “세례를 베풀고”와 “가르쳐”라는 두 개의 독립된 분사가 이어지는 형태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교사로 삼고 그에게서 배우고 그를 따르는 사람이므로, 제자를 삼는 것은 예수를 배우고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13:52을 고려하면 제자를 삼는 개념은 가르치는 사람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13:52과 연결해 보면 새것과 옛것을 나눠 주는 서기관을 만드는 것이 제자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에 제시된 분사의 순서에 대해 주목할 점이 있다면 이곳에서의 세례는 결코 완전할 수 없는 배움의 과정에 대한 입문이라는 다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세례 받은 자(도달한 자)와 준비 중인 자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발전 단계에 있는 “배우는 자들의 학교”인 셈입니다.
“세례를 주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세례 장면(3:13~17)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요한의 세례는 구원과 해방을 상징한 것인 반면 예수는 실제로 구원과 해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상징적인 행위인 세례로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는 할례를 받는 것이나 토라를 지키는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세워집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의미하기 때문에 제자를 삼는 것은 특정 공동체나 교파에 속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예수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도록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덧붙여서, 만일 구문의 측면에서 평행을 이루고 있는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가르치라는 명령의 배열 순서에도 어떤 의도가 있다면,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는, 끝이 없는 배움의 과정을 출발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례를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주는 것은 마태복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이름”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되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독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에서 들린 아버지의 음성과 하늘에 내려온 성령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3:16~17).
“이름으로”는 세례를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 밝히는 내용 이상으로 그 이름에 해당하는 존재와의 새로운 관계와 결속과 헌신의 관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즉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을 뜻하는 표현이기에, 세례를 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새로운 관계와 충성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 혹은 주권 안에 들어가는 것,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다스리시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사람의 소속을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즉 충성과 복종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겨자씨처럼 성장하는 교회에서 인간 지도자는 교사로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만, 지도자는 결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충성의 대상도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 명령,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를 삼는 것은 순종을 위해 가르치라는 명령으로 설명됩니다. 예수께서 다섯 개의 긴 강화를 모세와 같은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특별히 교회는 다섯 강화에 담긴 교훈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그가 구두로 전달한 교훈뿐 아니라 삶으로 보여 준 것도 포함해야 합니다. 교회는 강화 외에도 내러티브를 통해서 가르치고 보여 주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마태복음 전체에 담긴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치유는 여기에 포함되는가? 당연히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자신이 8~9장에서 보여 준 치유를 행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 치유 행위가 제외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교회는 다섯 개의 강화와 복음서 전반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며 치유, 곧 회복(희년!)을 위한 명령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순종해서 모든 민족으로 나가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의 함께하심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시대의 끝은 예수께서 인자로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재판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내가 항상 함께 있는다”에서 원어적으로 “에고 에이미”는 여호와의 자기 칭호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예수는 이제 자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마복음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증명되었다면(1:23, 임마누엘), 이제 부활하신 예수는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마태복음서의 처음과 마지막(1:23; 28:20), 그리고 본문 전체에 흐르는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이미 경험한 임마누엘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떤 방식으로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인지 예상하게 만듭니다. 예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열방에 복음의 증인으로 나가는 제자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예수는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 사실은 독자로 하여금 예수께서 증인으로 살아가는 교회 가운데 함께하는 목적이 보호와 도움임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덧붙여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임마누엘의 대상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임재를 약속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는 보장은 부르신 자들이 부족할지라도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예수께서 함께하시는 대상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제자들이며, 신적 임재의 약속이 주어진 것은 이 벅찬 과업에 착수하라는 명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