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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6:1-75

마 26:14-16 유다가 배반하다

by pooh_in_the_Way 2022.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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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6: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마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26: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26:14~16 1~5절과 연결됩니다. 이름 없는 여자가 아낌없이 베푼 헌신은 예수의 공동체 내의 한 사람의 배신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이며, 결코 타산적이지 않은 그녀의 행동은 그의 추악한 거래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독자는 장차 올 일에 대한 예수의 예고(17:22; 20:18; 26:2)에서 “넘겨주다”라는 동사가 반복해서 나타난 사실과 10장 4절에서 가롯 유다를 “예수를 판 자”로 언급한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러한 발전을 예감해 왔습니다.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갑니다. 유다가 열두 제자 중의 명이라는 표현은 이해할 없고 충격적입니다. 유다는 죽음을 예고했던(26:2) 예수께서 여자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12~13) 예수의 나라가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못할 아니라 예수께서 죽음을 향하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자가 예수의 운명을 예측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는 예수를 팔기 위해 대제사장들을 찾아갑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그러자 그들이 삼십을 지불했습니다. 유다가 삼십을 받은 사실은 그의 탐심을 암시합니다. 유다는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예수를 따랐고, 자신에게 이득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곧바로 달려가 팔아 버린 것은 아닐까? 예수가 보여 메시아의 모습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고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몸값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충성이 가장  덕목이었던 반면, 뇌물 때문에 배신하는 것은 가장 경멸받은 범죄 행위였습니다.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를 파는 장면은 자기의 소중한 것을 예수의 목숨을 위해 드리는 여자와 대조됩니다. 유다는 예수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따르는 자의 전형이며, 이런 태도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를 버릴  아니라 버리는 순간에도 이득을 챙기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가 탐심 하나의 이유만으로 예수를 팔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그가 가진 메시아 기대사상과 예수의 길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일  있습니다. 당연히 유다는 예수의 정체를 민족의 구원자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배반의 이유를 그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것으로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삼십을 예수의 몸값으로 받은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유다의 탐심을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길을 오해했다고 해서 모두가 유다처럼 메시아를 종의 몸값에 파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가 태도 변화를 보인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 가운데 유다가 이 지역 운동에서 유일한 비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며(10:4), 어쩌면 유다는 갈릴리 어부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함께 남쪽에서 온 그들이 유대 당국과 맞서자 곤란한 입장에 처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예수와의 관계 및 그의 역설적 가치관은 유다로 하여금 이 운동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며, 예수는 기대했던 민족 구원자와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실패와 패배로 끝날 것이 자명한 길을 선택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급선회는 예수가 자신의 사명에 대해 선언했을 때(16:21-23) 베드로가 보였던 본능적 반응에 대한 논리적 결론으로 보아야 합니다. 심지어 유다는 예수가 “이스라엘을 타락시킨” 자라고 생각했던 후기 랍비들의 주장을 따라 예수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유익 및 종교적 전승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유(추측에 불과하겠지만)가 무엇이든 유다는 늦기 전에 예수를 떠나는 것이 자신이나 이스라엘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유다가 이미 환멸을 느낀 것이 아니라면 예수에게 모든 삶을 바친 한 사람의 충정이 겨우 삼십 데나리온(아래 참고) 때문에 돌변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태는 금액에 대한 합의가 있기 전에 유다의 제안이 먼저 제시된 것으로 묘사합니다.

 

마태는 예수가 팔린 금액을 밝힘으로써 유다가 예수를 배신하는 대가로 받은 돈을 구약의 의미와 연결시킵니다. 예수는 소유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셨으나(6:24; 19:21), 마치 부자 청년이 탐심 때문에 예수를 따르지 못한 것처럼 유다는 삼십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것을 포기합니다. 유다가 받은 삼십은 출애굽기 21:32에서 가축이 타인의 종을 들이받았을 가축의 주인이 종의 주인에게 지불하는 삼십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임자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유다는 예수를 종의 몸값에 것입니다. 그리고 삼십 세겔은 스가랴 11:12-13에서 목자의 말을 듣지 않는 떼를 목양한 목자에게 고용인들이 지불한 금액입니다. “……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삼십 개를 달아서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마태복음에서 돈을 결국 토기장이에게 주는 내용이 27:9-10 나옵니다. 스가랴서의 화폐가 두로인들이 사용한 세겔이라면 삼십 세겔은 노동자의 최저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스가랴 11:12-13 기억하는 독자들은 가격이 낮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목자는 삼십에 종으로 취급받아 팔립니다( 11:12; 21:32).

 

마태의 관심은 예수가 구약에 제시된 가격인 삼십에 팔린 것을 통해서 그의 배반과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강조하는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유다가 종의 몸값에 예수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가치이기에 돈으로 환산할 없는 가치입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대중의 눈을 피해 예수를 넘길 기회를 찾습니다(16). “그때부터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갈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입니다(4:17; 16:21~16). 16:21 이후 예수는 다가오는 수난을 언급하기 시작하셨고, 26:16 이후 유다는 예수를 수난에 넘길 기회를 찾습니는다. “기회 좋은 기회로서 (누가복음 22:6의 표현) “무리가 없을 가리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사람이 많은 명절은 예수를 체포할 좋은 기회가 아니지만(26:5), 유다의 제안은 명절이지만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인적이 드문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붙잡힙니다. 이처럼 유다의 등장으로 새로운 기회, 유월절 기간에 예수는 넘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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