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6: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마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마26: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와서는 식탁에 앉은 그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예수와 제자 일행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베다니로 가서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머문 듯합니다. 시몬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 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는 알려진 인물일 것입니다. 우리는 시몬을 8:1~4과 11:5에 나오는 나병환자로도 추정해 볼 수 있는데, 8:1-4에서 예수는 나병환자가 자신의 치유를 제사장에게 보여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시몬이 나병환자와 관련이 있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본문 자체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있는 행위는 율법이 거부하는 것이기에(레 13:45-46), 제자들이 이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시몬이 현재의 장면에서는 나병환자가 아니었음을 말해 줍니다.
어쨌든 예수께서 나병환자와 관련된 시몬의 집에 거하신 사실은 예수의 마지막 여정의 특징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집이 아니라 땅에서 가장 부정한 사람을 의미하는 나병 환자의 집에서 장례를 상징하는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의 고난/죽음은 긍휼을 위한 것입니다. 시몬의 집에 한 여자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열어서 예수의 머리 위에 붓습니다. 그런데 여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자를 알았다는 암시도 없습니다(같은 사건으로 보이는 요 12:1~8에서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이었습니다). 여자의 행위가 기념비적인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이름이 아니라 행위만 기억될 것입니다. 마태의 관심은 어떤 영웅을 만드는 데 있지 않으며, 이 특징은 베드로에 대한 묘사에도 드러날 것입니다.
향유는 향수가 들어 있는 기름으로서 기념하고 축복하기 위해,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남자와 여자를 매력 있게 보이도록, 또는 장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6절은 머리에 바르는 기름을 식사에 초대한 손님에게 베푸는 접대의 한 과정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기름(특히 머리에 붓는 기름)의 용례는 왕이나 제사장에게 부어 그가 신성한 직무를 부여받았음을 보여 주며, 여자의 행위에는 “메시아적” 개념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독자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여인의 행위를 장례 준비로 보셨지만, 본문은 그 여인의 의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녀는 사실상 예수에게 그를 처형하는 자들이 하지 못한 일, 즉 고귀한 장사를 위한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관심은 현재의 육신적 안락이나 메시아적 지위가 아니라 임박한 수치스러운 죽음에 있습니다. 여자의 값비싼 헌신은 수치스러운 공포의 십자가를 상쇄합니다. 이것이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단지 타산적이지 않은 헌신의 모델만 되는 것이 아니라(확실히 그러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의 죽음의 가치를 확증했던 것입니다.
8-9절, 제자들이 보고는 화를 내며 말했습다. ‘‘왜 이것을 낭비하시오? 이것은 비싸게 팔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오.” 10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의 평가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알아채신 것으로 표현하는 점은 제자들이 공개적으로 소리를 냈다기보다는 중얼거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참조. 12:15; 16:8; 22::8). 제자들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특별히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 행해졌으며 (참조. 요 13:29),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치셨기에(마 25:35~40), 제자들은 마땅히 이런 절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자가 기름을 붓는 사건이 구원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드러나게 될 결과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 때문에 무명의 여인은 향유를 부었으나 제자들은 도망할 것입니다.
예수는 초월적 지식으로 제자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여자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나를 위해”, 예수를 위해 좋은 일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좋은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5:16),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알려질 것입니다(13절).
11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제자들과 함께 있다’는 예수의 말씀은 신명기 15:11의 암시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의 본문은 가난한 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가난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래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덜 가져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15:7~11은 교차대구의 구조로 중앙에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 배치되므로, 이 단락의 핵심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가난한 자들이 땅 혹은 이스라엘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봄으로써 땅의 희년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신명기 문맥의 의미처럼 예수의 말씀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차선의 것으로 생각하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긍휼은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강조하신 가치이며, 예수는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11:5).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언제나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사명에는 이들을 예수님처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참조. 신 15:4)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맡은 제자들에게는 더 강력하게 다가와야 하며,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는 의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에서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의미를 경고의 분위기로 알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신앙 공동체든, 사회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이 여자가 보여 준 것처럼 예수를 섬기는 것보다 우선시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더 적절히 그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희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26:2에서 예고한 십자가 처형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시지만 성육신의 예수께서 행하시는 지상 사역의 시간은 곧 끝날 것입니다(26:2; 9:15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러므로 예수는 성육신의 시간과 부활 이후의 시간을 구분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12절,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잔치를 주최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을 장례를 준비한 행위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장사를 지내는 것은 가장 큰 덕목이었으며,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자선과 장례나 매장에 헌신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후자가 유대 문화에서는 더 칭찬을 받는 행위였습니다. 예를 들어, 람비 전통에서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은 기부나 나그네를 섬기는 것이나 환자를 방문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윤리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여자의 행위는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가난한 자를 위한 기부를 능가하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여자는 예수의 죽음을 예견하고 향유를 부었는가? 아니면 귀한 손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부었는데 그 결과가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되었을까? 본문은 여자가 예수의 죽음을 알고 왔다는 암시를 주지 않습니다. 무명의 여자는 예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신의 귀한 것을 드렸는데 결국 그의 행위가 예수의 시각에는 메시아의 장례를 준비하는 “좋은 일”이 된 것입니다.
13절, 예수는 복음이 전해지는(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곳마다 여자가 행한 것을 기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파송받는 제자들을 통해 가능해집니다(28:19~20). 여기서 “이 복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께서 여자가 향유를 붓고 나서 “이 복음”이라고 하셨으므로, 이 복음은 여자가 기름을 부은 행동과 연결됩니다. 여자의 행위는 예수의 장례 곧 죽음을 위한 것이었기에, 이 복음은 예수의 수난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복음의 핵심 부분에 해당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온 것이며(사 52:7), 이 나라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올 수 없습니다. 예수는 천국의 복음을 가져오셨는데, 복음을 가능하게 만든 그의 수난 역시 복음입니다. 또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은 연결되는 주제이므로(16:21; 17:9, 23; 20:19) 부활도 복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등극하거나 승리한 기쁜 소식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와 직결되지만,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천국의 우주적 통치를 오게 만든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24:14의 “그 나라의 이 복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13절의 후반부를 직역하면 “그녀가 행한 것도 그녀를 기억해서 말해질 것이다”가 됩니다(개역개정은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로 번역합니다). 누구를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일의 가치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여자가 행한 행위의 가치를 언급하고 나서(10~12절) 13절을 말씀하심으로써 여자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대조하십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오면서 예수의 가치를 활용해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의 생애 자체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생애, 특히 죽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의 행위는 복음과 직결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됩니다. 복음은 인격과 분리된 채 전해지지 않습니다. 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희생한 사람들의 삶이 복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여자의 이름을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는 대상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행한 일임을 암시합니다.
또한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여자”의 행위가 기억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태는 무명의 여자가 향유를 붓는 장면에 이어서 여자를 비판하는 제자들과 예수를 죽이려는 유다의 음모를 배치함으로써 예수의 사역을 경험한 여자를 중요한 목격자로 제시합니다. 이는 마태가 14:21과 15:38에서 “여자와 어린이 외에”를 더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이 사건 이후 예수의 수난과 부활 장면에서 제자들은 무너지는 반면 여자들은 더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증인들로 등장합니다. 빌라도의 아내(27:19), 십자가의 목격자들(27:55~56), 무덤의 목격자들(27:61), 부활의 목격자들(28: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