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통전적으로 성경 읽기
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2:1-46

마 22:23-33 부활 논쟁

by pooh_in_the_Way 2022. 4. 12.
728x90

마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마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마22: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22: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마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22: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예수의 적대자들인 대제사장들(21:23; 21:45) 백성의 장로들(21:33)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성공하지 못하자(21:45; 22:15),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 정치적인 이슈라면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신학적인 주제에 해당합니다.

 

같은 날에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질문하면서 말했습니다사두개인들은 예수께서 바리새파처럼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부활에 대해 수난 예고 때마다 함께 언급하셨습니다(16:21; 17:22~23; 20:17-19). 부활이나 천사를 믿지 않은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교리이고 이성적으로도 성립될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부활 사상을 담고 있는 본문은 다니엘 12:2~3, 이사야의 묵시록( 24~27; 특히 25:8; 26:13-21), 에스겔 37 등입니다. 특히 다니엘 12:2~3 2성전기 유대교에서 의인의 운명을 묘사할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마태복음도 13:43에서 구절을 암시했습니다.

 

2성전기의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언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회복시킬 것이라는 부활 사상과 개인들이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것이라는 개념을 결합해서, 현재의 포로 상태가 종결되고 하나님이 죽은 의인들을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표준화된 교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의 역사가 끝나는 것에 대해서나 개인이 죽고 나면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세의 생애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의인들이 언제 부활할 것인지(. 죽음 즉시? 최후 심판의 ?) 대한 생각도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2성전기에는 내세에 대해 표준적인 개념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교의 철학 학파 또는 분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중에서 바리새파와 에세네파는 내세를 믿은 반면 사두개파는 죽음 이후에 영혼이 살거나 징벌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한편, 사두개인들은 내세, 영혼의 불멸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의주장은,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 것입니다. 특히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에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오경에는 부활의 근거가 없다고 확신했는데, 내세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생각은 그들의 사회/종교적 지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급진적인 변화를 기대한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와 달리, 사두개인들은 현재의 질서에 대체로 만족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사실상 국내 정치와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권력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다음 생애보다는 세상의 내부 문제를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24절, “선생이여, 모세는 말했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그의 아내와 결혼해서 자신의 형제를 위해 자손을 세워야 한다.’” 그들의 출발점은 모세의 수혼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후손이 없이 죽은 남자의 이름과 재산 상속을 위해 가문을 잇게 해 주는 제도입니다. 하나의 정책으로서 이 제도는 실생활보다 이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혼 제도에 관한 광범위한 랍비의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 제도가 계속해서 살아 있었음을 보여 주지만, 구약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원리를 상기시킨 사례가 두 곳에만 나타나며, 두 차례 모두 해당 친척이 수혼의 의무를 꺼립니다( 38:6-11; 4:5-10). 사두개인은 실제적 인용보다 율법의 핵심 내용에 대한 요약을 제시합니다. 이 요약은 신명기 25 5-6절의 규정을 간략히 제시하지만,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문자적으로는 ‘씨’]를 세울지니라”라는 구절은 70인역 창세기 38 8절의 원형을 반영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질문을 하면서 먼저 모세 이름을 거론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세오경을 말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을 경우에 기괴한 현실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부활 교리는 모순이라고 항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의 계명을 어기는 것임을 보여 주려고 질문합니다.

 

25-28, 우리 가운데 일곱 형제가 있었소. 장남이 결혼을 했지만 자손 없이 아내를 그의 형제에게 남겨 두었소. 둘째도 그와 같이 했고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마찬가지였소. 결국 그들의 아내도 죽었소. 그렇다면 부활 때에 일곱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소? 왜냐하면 모두가 그를 취했기 때문이오.

 

수혼 제도, 일명 형사수취제는 형제가 죽었을 경우에 그의 형제와 결혼하는 제도이므로 일처다부제가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면 부활 때에 일곱 남편 중에서 누가 아내의 남편이 되는지 묻습니다. 그들의 논리에서는 명의 아내가 여러 명의 남편을 두는 것은 불가하므로, 일곱 중에서 명을 어떻게 정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두개인들은 신명기 25:5-10 있는 율법과 창세기 38:8 있는 구체적인 예를 활용해서 부활이 율법에 저촉되는 사상인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교리는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모세오경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부활은 성경의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는 교리입니다. 또한 24절에서 그들이 판단하고 있는 몸의 부활은 현재의 세상과 단절된 너머 세상의 삶이 아니라 현재의 생애와 연속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몸의 부활이란 결혼 관계와 생활이 다음의 생애에서도 현재와 같이 존속하게 것인데, 어떻게 일곱 형제와 명의 여자 간에 벌어질 일을 설명할 있는가? 현재 일어나는 현상에 근거해서 상상해 부활의 상황은 기괴해서 실현될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만일 어떤 남자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버렸는데도 하나님이 죽은 남자를 살릴 것인지, 과연 살릴 있는지 질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살릴 것인가?) 능력(살릴 있는가?) 대해 묻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해석학적 이슈(“부활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신학적 이슈(“하나님은 죽어 버린 남자를 살리지 않고 살릴 없을 것이므로 부활은 있을 없다”) 관련이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는 성경의 근거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대답하실 것입니다. 먼저 사두개인들이 틀렸다고 하십니다. 흥미롭게도 이때 사용된 동사는 양이 길을 헤매는 모습을 묘사하는헤매다 같은 단어입니다(18:12). 사두개인들은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있는 ? 예수는 가지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예수의 대답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나타난 해석학적 이슈와 신학적 이슈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는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난 것이었습니다(21:16, 42).

 

30, 왜냐하면 부활 때에 일어나는 가지 연결되는 사항, 장가를 가지도 않고 시집을 가지도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부활 일어나는 가지 연결되는 사항을 언급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시간적 의미의부활이 일어날 사건보다는 그것에 이어지는 삶의 상태에 대한 언급입니다. 따라서 사실상 이 구절은 “하늘에서는”이라는 뜻입니다. 질문 자체가 결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대답은 하늘에서의 삶 가운데 결혼 생활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원리는 보다 광범위하게 진술될 수 있습니다. 즉 하늘에서의 삶은 지상에서의 삶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29)은 일시적인 삶이 아닌 영원한 삶에 적합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창조하십니다. 확실히 성생활은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출산은 땅에 속한 것이며, 하늘의 삶에는 출산이나 양육이나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출산의 배경이 되는 하나의 제도로서 결혼은 하늘의 삶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배타적 관계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는 사람들이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인 천사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늘에서의 삶은 결코 결혼 관계보다 못하지 않으며, 그 이상일 것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 결혼한 사람들의 사랑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러한 사랑은 아무도 배제되지 않을 만큼 확장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사두개인처럼 이 땅의 경험만으로 앞으로 올 삶을 평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31-32, 제의 변화를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사두개인은 모세오경(그들은 “모세”로 칭한다, 24)만 성경적 권위를 가진 책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는 이 책에서( 12:2나 다른 선지서 및 지혜 문헌이 더 분명한 말씀이 되겠지만) 논증을 도출합니다. 32절 본문은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 70인역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내러티브의 배경에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성경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를 족장들의 하나님으로 묘사한 사례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인데, 생소한 것은 예수가 이 구절에서 도출한 추론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수백 년 전에 죽은 이 유명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이러한 관계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인용하신 구절, 출애굽기 3:6에서 하나님이 광야의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 이르시되 나는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 수백 전에 죽은 유명한 사람들의 하나님이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이러한 관계가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언약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상태이지만 하나님은 이들과 현재적으로 함께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될 있는가?

 

하나님과 그들을 결속시킨 언약은 죽음으로 끝나 버릴 만큼 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 땅에서의 삶을 넘어 하나님만큼 영원한 관계로 이어집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는 사실상 죽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도 그와 함께 삽니다. 이것은 엄격한 논리의 문제라기보다 믿음의 문제이며, 멀리 계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율을 주장하는 사두개인의 신학은 이러한 논리를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더 많은 무게를 두는 사람에게 이 논증은 죽음 이후의 삶이 신구약 중간기의 독창적 신학이 아니라 언약을 제정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근거한다는 확신을 주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은 오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적합한 호칭이 아닙니다.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이 구절은 예수의 첫 번째 확장된 가르침 이후 갈릴리 무리가 보인 7 28절의 반응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곳에서의 “놀라움”은 긍정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강력하고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