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21: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마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마21: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마태의 기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곧 바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 즉시 행동한 것으로 기록합니다.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들어와 처음 당도한 곳은 성전입니다. 유대 사상에서 이 거룩한 곳의 중요성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나라의 종교적 삶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말라기 3:1에 묘사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본문의 배경은 이방인의 뜰입니다. 이곳에서 성전 제사에 사용할 짐승을 파는 자들과 순례객의 돈을 성전 헌금(특히 매년 유월절 전에 납부하는 성전세)을 위한 특별한 두로의 동전으로 바꾸어 주는 자들은 주랑 현관 아래에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갈릴리처럼 제사에 쓸 짐승을 가져올 수 없는 먼 곳에서 오는 순례객에게 대체로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었지만, 장사하는 자들은 이러한 활동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상점의 위치가 사실상 성전 안이라는 사실은 많은 논란의 소지를 남길 수 있으며, 이들이 제사장들의 허락을 받아 성전 구역 안으로 들어온 것은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AD 30년 무렵 가야바가 공회의 요구에 따라 원래 감람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위치에서 성전 안으로 옮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주로서 갑자기 성전에 오십니다. 그곳에 벌리신 일련의 행위, 이를 성전정화 사건, 또는 성전 철결 사건으로 부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스가랴서의 암시라는 관점에서 20:1~11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가랴서의 문맥을 고려하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왕의 장면(슥 9:9)은 스가랴 14:20-21에서 성전의 그릇이 청결해지고 더 이상 성전에서 매매가 없을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스가랴 14:21은 “그날” 더 이상 성전에 상인들이 없을 것이라고 예언하므로, 이제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은 상인들을 내쫓으시는 “그날”이 왔음을 상징적으로 전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의 성전 회복은 메시아의 성전 청결 행위로 시작된 것입니다.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하신 예수의 시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대제사장과 장로들로 하여금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는지 묻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23절). 또한 복음서는 예수 혼자만의 시위로 묘사하며 성전 경비대나 로마 당국의 즉각적 개입이 없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작은 규모였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큰 무리가 모여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쪽 구석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사에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만큼이나 이 두 번째 극적인 행위의 결과는 그만큼 놀랍고 도전적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자연 발생적인 분노의 표출이라기보다 계획된 행동이며 메시아의 권위에 대한 공적인 표현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의 분노는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 매매에 연루된 부패 행위나 상점의 위치를 변경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에서 장사하는 집으로 바꾼 것에 대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예수는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을 인용하심으로써 자신의 청결 행위를 정당화하십니다. 헬라어 문장의 순서로는 이사야 56:7이 예레미야 7:11 앞에 나옵니다. 성전은 이사야 56:7(70인역)에서 만민이 기도히는 집으로 묘사된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회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사야 56장에 나타난 해방에 대한 환상에서 하나님이 모으신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며,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자들과 하나님 백성 외의 사람들(이방인들)도 예배에 합류할 것입니다. 이사야 56:7에서 번제와 희생은 기도와 대조되지 않고 함께 이뤄집니다. 예수도, 기도와 제사를 대조하지는 않지만, 번제와 희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앞으로는 열방의 기도로 대체될 것을 암시합니다. 이사야 56:7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을 암시하는데(왕상 8:33~53, 특히 41~43절), 제사는 기도의 표현으로 여겨졌고 기도와 함께 이뤄지도록 의도됐습니다. 성전의 제사는 기도와 결합되어 있어서 제사의 향기는 기도를 상징합니다(시 141:2; 계 5:8). 기도와 성전의 관계는 후대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유대인들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갔습니다.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아침과 저녁 번제 시간에 기도를 한 점도 제사와 기도의 연결을 뜻합니다(단 9:21).
이처럼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만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고 예루살렘 밖의 사람들에게는 특히 예배와 기도가 연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의 제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도의 집”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행동하는것을 비판하십니다. 성전 예배/제사의 목적은 만민이 기도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전 책임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망각하고 재정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성전을 악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어떤 약속과 계획을 펼치길 원하시는가? 이사야 56:7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동등하게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장소를 시온에 있는 종말론적인 성전이라고 약속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전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님이 시기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몰려 올 것입니다. 예수는 성전에서 옳지 않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무지한 사람들을 책망하시지만 그것 이상의 목적으로 성전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유대교의 내부 개혁자 정도에 머물지 않고 오래전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깨우쳐 주십니다. 특히 성전 정화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이방인의 뜰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현재의 성전이 유대 민족주의자들의 편협한 사고와 우월주의와 탐욕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보시고 종말의 성전을 내다보십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성전이 제 기능이 다했으므로 원래의 목적에 따라 만민이 기도하는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비판은 예레미야 7:11에 근거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7장(성전 설교라고 불립니다)의 강도의 소굴은 성전에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악함과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안전지대로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7:11은 성전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1:13에서 폭력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강도”(레스테스)는 노상강도나 혁명가(게릴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혁명 세력으로 이해하면, 본문의 용어는 로마에 반대해서 혁명을 도모하는 열심당원이나 혁명가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나(마 27:38 이하), 본문의 흐름을 고려할 때 예수께서 주목하시는 대상은 성전의 제사장 권력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있었던 성전에서 안전하게 수익을 창출하면서 권력을 행사했으므로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을 꿈꾸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서 마음껏 성전을 소굴로 삼아 경제적 행위를 즐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도는 성전을 경제적인 이득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백성의 재산을 강탈하는 제사장 권력을 가리킵니다. 마치 범죄자인 강도들이 자신들을 위한 소굴을 물건을 강탈해서 저장하는 장소로 사용했듯이 성전 책임자들은 백성의 재산을 약탈해서 얻은 부를 성전 보고에 축적했기에, 성전은 날강도들이나 다름없는 제사장들의 소굴이었습니다.
14절, 여전히 성전에 계실 때에, 맹인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이 성전에 계신 예수께 왔고, 그는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병자를 고쳤다고 언급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전형적인 치유 기사는 “모든 앓는 자”나 “병든 자”와 같은 매우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합니디만, 이곳의 환자에 대한 설명은 맹인과 저는 자들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 기사가 성전을 배경으로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독자로 하여금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처음 포로가 되었을 당시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치리라”는 조롱을 받고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었으며 그 결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속담이 생겨난 사실(삼하 5:6-8)을 상기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는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을 맞이하며 그들을 결코 내어 쫓지 않고 고쳐 주십니다. 마태가 독자에게 이러한 대조를 기대한다는 사실은 15절에 제시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어린아이들의 외침 속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실제로 다윗의 자손이지만, 이 시점에 있어서 다윗과의 연결은 유사성보다 대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2장 41-45절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의 적절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됩니다.
15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말하는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16절,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고 예수께 항변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분노케 한 것은 병자를 낫게 한 사실보다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메시아적 진술에 기인한 것이며, 성 밖 갈릴리 무리가 반복하고 있는 위험스러운 정치적 표현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동쪽 무리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어린아이들”은 다음 절에 제시되는 예수의 인용문에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첫 번째 단어는 11:25에서도 반복된다)로 언급되지만, 이것은 시편의 용어로서 여기서는 적어도 예수에 대한 열정을 스스로 표출할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임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의 말은 스스로 도출한 신학적 추론이라기보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서 배운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아마도(그들이 노했다는 진술에 의하면, 그리고 누가복음 19장 39절에서 예수에게 제자들의 메시아적 환호를 못하게 할 것을 요구한 바리새인들처럼 ) 메시아적 환호를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요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잘못된 열정에 대한 사과는커녕 예수는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이 말씀은 70인역 시편 8편 3절[개역개정 8:2]에서 온 것입니다. 이 시편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권능”으로 말미암아 대적을 잠잠케 하셨는지 보여줍니다. 이 “권능”은 찬양에서 종종 하나님에게 돌려집니다(가령 시 29:1; 59:16-17; 68:34-35). 이 “권능”이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70인역이 이것을 “찬양”으로 번역한 이유를 잘 보여 줍니다. 70인역은 이 본문과 성전에서 예수의 상황의 관련성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지만, 이 히브리어의 기본적 의미도 어린아이들의 말을 통해 입증된다는 것으로, 이곳에 제시된 예수의 인용문도 이러한 의미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 인용문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시편에서 하나님(8:4의 사람과 구별된다)에 대해 찬양한 내용이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찬양한 것에 적용된다는 예수의 대담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시편의 어린아이들이 대적에 맞서 하나님이 옳으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특히 이 인용문이 “여호와”가 성전에 임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수의 행동에 이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17절, 예수는 비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떠나 도성 밖으로 나가십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이 아니라 “그들을” 떠나셨다고 표현함으로써 성전 타락의 책임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돌립니다. 비슷한 표현이 24:1에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베다니에 들어가 숙박하십니다. 유월절에는 순례자들이 아주 많았 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숙소를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에서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으며, 베다니에서 예수 일행은 한 주 정도 머물 숙소를 마련한 것으로 보입니다(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