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마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마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마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무리와 제자들을 배불리 먹이신 후 예수는 “즉시” 제자들에게 배에 들어가서 배를 건너편으로 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동안 그는 무리를 보내셨습니다. 뒷수습을 예수께서 홀로 하실 정도로 갑자기 분위기가 급해집니다. 여기에 많은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예수가 무리를 보내기도 전에 제자들을 그곳에서 떠나게 한 것이나 이례적으로 강한 동사(“가게 하시고”는 지시보다 강요나 강제의 의미를 가집니다)를 사용한 것은 광야에서 이 사건의 “정치적” 영역을 부각시키는 요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요한복음 6장 14-15절만큼 강하게 부각되지는 않습니다.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자연 발생적이든 계획된 것이든 예수를 공개적인 메시아적 역할(요 6:15의 "임금”과 같은)을 하도록 압박하려는 대중적 시도가 있었다면 제자들도 동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16장 21-28절에서 제시될 메시아적 지표와 반대되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능한 빨리 제자들을 격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요한복음의 기사를 토대로 행간을 읽은 것입니다.
마태는 이 상황에서 어떤 정치적 뉘앙스에도 관심을 갖지 않으며, 예수가 제자들을 속히 보내려 한 이유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상황이 악화 되자 산으로 갔다고 하는 요한복음과 달리, 마태는 예수가 단호하게 지휘하는 모습을 제시하며 무리는 예수의 지시에 따라 돌아갑니다.
건너편은 오천 명을 먹이신 장소에서 볼 때 갈릴리 바다 건너편을 뜻하는데, 제자들이 도착한 곳이 게네사렛이므로 배는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가버나움의 동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신 후에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에 대한 규명은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은 14장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리에게서 벗어나려는 시도입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 홀로 계셨습니다. 본문은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 있었던 시간(4:1-11) 이후 예수가 혼자 있다고 마태가 언급한 유일한 구절입니다. 마태는 다른 곳에서는 예수가 혼자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기도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예외적 언급은 이 시점에서 예수의 사역에 한 차례의 위기가 다가왔음을 보여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침묵을 통한 논증일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서서히 기도로 고난의 길을 준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편, 마태는 앞으로 이어질 제자들의 위기를 고려해서 제자들이 겪는 어려움의 현장에서 예수는 매우 멀리 떨어져 (즉 바다에서 먼 산에) 계신 상황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만이 탄 배는 이미 육지에서 떠나 깊은 곳에 이릅니다. 제자들이 벳새다 지역 부근에서 게네사렛으로 가던 중이라면 그들이 그처럼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아마도 그들은 역풍으로 표류 중이었을 것입니다. 바람 또는 폭풍이 제자들의 배를 향해 불어와 파도가 배에 강하게 부딪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배가 가라앉는 위험이 아니라 배가 앞으로 가지 못 하는 위기에 처합니다.
밤 사경(로마 시간 용어로, 오전 3~6시)은 예수께서 거의 밤새워 기도하셨음을 보여 주며 그 시간에 제자들은 배를 젓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는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돕고 그들이 서쪽 해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합류하기 위해 그들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예수가 “오시는” 방법은 도움을 주기보다 공포를 초래했습니다. 예수가 물 위로 걸은 것은 예수 전승에 포함된 내용이며, 마태는 이처럼 놀라운 장면에 대해 설명이나 논평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마태는 그들이 어떻게 어두운 밤에 예수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밤 사경이라는 언급은 이미 동 트기 전 여명의 기미가 있음을 암시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의 미신적 반응은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미신적 반응은 신학적이라기보다 본능적인 것이며 악한 영이 물 위에 산다거나 익사한 사람이 물 위를 떠돌아다닌다는 통속적 사고를 반영합니다
본 내러티브를 전체로 읽으면 예수께서 오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오시는 예수는 물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제자들을 위협하는 바다의 파도를 짓밟으시는 예수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70인역 본문은 하나님을 “바다 위를 땅 위처럼 걸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참조. 시 77:19; 사 43:16) 마태는 70인역에 있는헬라어 동사 “걷다” 그대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시거나 바다(의 파도)를 짓밟으시는 모습은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뒤흔드는 세력을 제압하시는 분임을 상징하는데, 바다를 밟으시는 것은 더 강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바다를 걷는 모습은 바다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사실을 나타내며, 바다를 걸어오시는 목적은 제자들을 구출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의 힘으로는 바다의 파도를 극복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구약의 하나님의 권위로 이 위기에서 제자들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공포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즉시” 반응하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이 부사를 문장의 맨 처음에 배치합니다.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안심하라”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십니다. “나다”는 유령이 아니라 예수 자신임을 강조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신적인 존재, 즉 여호와의 자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인가? 두 개의 의미가 모두 의도된 것으로 보입니다. 유령이 아니라 제자들이 알고 있는 자신을 알리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구약에서 여호와의 자기 칭호인 “에고 에이미”를 떠올립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의 자기 칭호를 듣고 구약에서 여호와를 가리키는 묘사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은 안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므로(임마누엘)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임재(임마누엘)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목적은 그들을 구출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자신을 명령해서 물 위로 오도록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27절의 “주”는 예수께 경의를 표현하는 것인가,아니면 신적인 존재를 부른 칭호인가? 베드로는 신적 권위로 물 위를 걷고 “에고 에이미”를 사용한 예수에 대한 반응으로 “주”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뒤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것처럼, 내러티브의 플롯이 발전하면서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인식도 실제 예수의 정체에 근접해집니다. 물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어려움이 닥쳐오는 현실 속에서도 예수를 그렇게 믿어야 하지만, 아직은 제자들의 고백이 그 정도까지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배 안에서 공포에 떨던 베드로는 바다의 파도를 제압하고 계시는 예수의 능력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됩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의지한 베드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을 본 베드로는 두려워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라!”고 하신 예수에게서 눈을 떼고 바람에 압도당할 때 물에 빠져 듭니다.
예수는 즉시 손을 뻗어 베드로를 붙잡아 구원해 주십니다. 31절에서 “즉시”를 문장의 맨 앞에 배치함으로써 예수의 즉각적인 반응을 강조합니다. “손을 뻗어” 구원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출 3:20; 7:5).
예수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꾸짖으십니다. 형용사 “믿음이 작은”, 믿음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믿음이 작은 상태로, 마태복음에서 이 용어는 전부 예수의 입에서 나왔고, 적용되는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용어만 독립적으로 나오지 않고 예수의 질문이나 대답이 결합됩니다.
6:30에서 예수는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이 “너희”를 먹이지 않겠느냐고 하실 때 “너희에게 더욱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26에서 예수는 갈릴리 바다에서 바람을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습니다. 16:8에서는 빵을 가져오지 않은 것 때문에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왜 떡을 가져오지 않을 것 때문에 서로 논의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17:20에서는 제자들이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물을 때는, “너희의 작은 믿음 때문”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작은 상태는 제자들의 신앙이 모호함을 보여 줍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를 신뢰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상황에 따라서 흔들리고 실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해 또는 자신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바람을 그치게 하십니다. 정확하게는 풍랑은 예수의 책망으로(8:27)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 멈춥니다. 예수께서 배 안으로 들어오시는 장면은 임마누엘의 주제를 드러냅니다. 즉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함께하심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곧 구원입니다.
베드로가 구원받는 장면을 포함해서 이제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을 겪은 배 안의 사람들은, 즉 제자들은 예수를 경배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참조. 3:17; 16:16; 17:5; 27:54)이라는 칭호는 하나님(3:17), 귀신들(4:3, 6; 8:29), 저자의 설명(2:15) 이후 처음으로 제자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늘 아버지와의 관계(예수의 아들 되심)와 예수의 신적 능력(8:29; 14:33)을 포함합니다.
이곳의 긍정적인 진술과 앞의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신 이야기의 끝부분에 제시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8:27)라는 의문형의 대조에 주목할 때에 이르렀습니다. 덧붙여서, 내러티브 순서에서 베드로는 곧 예수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16:16) 이처럼 내러티브가 전개되면서 예수의 정체는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신적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자 이방인 백부장의 입에서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내용은 교회 예배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경배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고백은 교회의 예배를 미리 보여 줍니다. 이는 초기 교회가 물에 빠져 가는 것과 같은 두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정체를 확신하고 예수의 함께하심을 믿도록 의도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그래서 혼돈과 악의 상징으로 자주 묘사되는) 바다는 신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불가피하게 발견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곤란을 나타냅니다.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그의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잊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악에서부터 그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이 작음을 보여 준 행동은, 교회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의지의 강함이나 용기가 아니라 구원해 주시는 예수의 임재임을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