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4장 36절부터 ‘파루시아’ 때 인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주제가 본 강화의 후반부를 지배했습니다. 이제 이 주제는 그때 일어날 심판 장면에 대한 이상을 통해 장엄한 절정에 이르면서 종말 강화의 결론에 이릅니다. 그때가 되면 다니엘 7장 13-14절의 이상이 성취되어 인자가 보좌에 앉고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에 대한 결정적 구별이 있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로 절정과 결론에 이릅니다.
31절, 인자가 그의 영광으로 올 때, 그리고 모든 천사들이 그와 함께할 때, 그는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입니다 . 이 심판 장면은 대부분 다니엘 7장 13-14절과 광범위한 배경에서 옵니다. 유사한 이미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19장 28절에 예수께서 예고하신 내용과 같습니다. 본문의 “인자”와 “오심”과 “영광”은 등극 장면과 마찬가지로 다니엘서를 직접 반영하고 있습니다. 전문 용어에 해당하는 “보좌”와 ‘천사와 함께 온다’는 내용 및 심판에 관한 주제는 모두 다니엘 7장 9-10절의 이상을 배경으로 도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지만, 여기서는 다니엘 7장 14절에 묘사된 대로 인자의 등극이 성취됩니다. 다니엘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평결이 선언된 것처럼 25:31-32에도 영광의 보좌에서 최종 평결이 주어집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본 단락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 모으고 염소로 지목받은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할 것이 암시됩니다.
“모든 민족들”이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이는 것은 이 심판이 최종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 내지 우주적 심판임을 의미합니다. 보좌 앞의 “앞”은 하늘회의(하늘궁정, 하나님의 회의 등으로 불림) 또는 하늘 법정(하늘궁정의 기능 중에서 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을 묘사하는 전치사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모습은 요엘 3:2(“내가 만국을 모아 … 그들을 심문하리니”), 이사야 66:18(“때가 이르면 뭇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과 유사한데, 특히 이사야는 “모으다”, “모든 민족들,” “영광”과 관련된 내용을 사용합니다. 최후 심판의 특징은 “분리”입니다. 13:49도 동일합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인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모두 재판장 앞에 서게 되고, 그는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과 분리하듯이 그들을 서로 분리할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는 인자가 목자와 왕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는 양들을 오른쪽에, 염소들을 왼쪽에 세울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직유의 초점은 구별의 목적이 아니라 과정에 맞추어집니다. 이 이미지는 지금까지 구별 없이 함께 살아 왔던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구별하는 인상적인 사례를 제시하는 것으로, 곡식과 가라지(13:29-30)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25:1-12)들이 확연하게 분리되는 이미지와 동일합니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이 선호되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양들은 오른쪽에 세워지고,왼편은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염소들은 왼쪽에 세워집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임금이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을 자들이여, 세상의 처음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흥미롭게도 왕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이 말은 인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므로 “내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상속받다”는 팔복(5:5)과 열두 제자들을 위한 영원한 복을 언급한 19:29에 사용된 용어로서,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 천국에 다분히 들어간다는 이상으로, 그들 자신이 왕이 되어 그들의 주의 왕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즉 왕의 통치에 참여하는 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의인”은 “왕들”의 지위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충성된 종이 부가적 권세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24장 47절, 25장 21, 23절의 원리보다 강력한 진술입니다. 이 새로운 지위는 사후 조치가 아니라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된 목적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앞서 20장 23절에서 하나님이 예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자를 이미 “예비”하신 사실을 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개념이 이 왕권을 “상속”받을 모든 자에게로 확산되며, 그것을 결정한 시기는 창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35-39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을 받는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긍휼 때문입니다. . 이곳에 제시된 어려운 상황과 도움에 대한 묘사(“의인들”의 대답에도 내용의 변화가 거의 없이 되풀이됩니다)는 대부분의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한 단체나 사회나 시대에만 해당하지 않으며, 오늘날 서구 사회만큼 물질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공통적 경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목록에서 특히 기독 교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나그네 되었다는 것과 옥에 갇혔다는 언급으로, 복음전파자로서 전도 여행을 하며, 사역하는 중에 이러한 박해와 위험에 직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네 형제 중에”로 기독교인들에게만 한정된다고 본다면). 그러나 그리스도인만 이러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동적이고 정치적 변동이 심한 로마 사회에는 이런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 목록에 열거된 행위들은 중동 사회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친절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대만큼 부응하지 못했을 것입니이다. 정상적인 의무로 보기 어려운 것도 있는데, 그것은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가족이 아니라면 하기 어려운 일이며, 히브리서 10장 34절은 이것을 박해당한 형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한 가지 특징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정 시나리오가 이 구절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식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37절에서, “양”은 46절의 최후 선고를 내다보고 “의인”으로 묘사됩니다. 마태복음의 “의”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면, 이 용어는 다른 사람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을 대접함으로써(7:12), 예수의 율법에 대한 요약을 실천한 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베푼 사랑의 행위의 대상이 인자였다는 말씀에 그들이 놀랐다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적 필요를 채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의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 ….(행하였)나이까”로 한 질문에 대하여 임금은 의인들에게 그들이 “내 형제들의 지극히 작은 자들(소자들) 중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작은 자들(소자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지 여부).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에서 “내 형제들”(12:48-49; 28:10), “작은 자들”(10:42; 18:6, 10, 14), “소자”(25:40)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 일반을 의미하는 용어들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12:48-50).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며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들로 부르십니다(28:10). 덧붙여서, “소자”는 10:42과 18:6, 10, 14에서 교회나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25:40의 “내 형제들의 작은 자들 중 하나”은 예수의 명령에 따라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그리스도인 메신저들입니다. 예수께서는 18장 20절에서 자기 백성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들과의 동질성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십니다. 그들의 경험은 예수의 경험이며, 그들에게 한 것은 예수에게 한 것입니다. 10장 40절의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및 18장 5절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는 말씀으로 확증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10장 40-42절의 메시지를 더욱 확장합니다. 예수를 대신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예수에 대한 태도를 보여 줄 뿐 아니라 보상의 준거가 됩니다.
당시의 기독교 상황에서 볼 때에,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 이후에 온 세상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이들로 인해 곳곳에 임마누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궁핍하고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에 냉수 한 그릇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소자들을 대하는 사람은 이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이 됩니다. 18:10, 14에 있는 소자 역시 교회에서 어떤 문제로 헤매고 있는 사람, 교회와 관련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24:14과 28:19을 함께 읽으면 “모든 민족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통해 하늘나라의 복음을 접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후에 인자가 와서 이들을 모으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분입니다.
41절, 그때 임금은 그의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이여,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리고 그 이유는 42절부터 45절까지로서, 35-39절과 반대입니다. 34절에서 “오라”고 했던 왕은 이제 “나를 떠나라”고 하면서 왕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들은 “복 받은 자들 대신 “저주 받은 자들”입니다. “창세로부터 … 예비된 나라” 대신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34절과의 평행으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이라는 구절을 기대하게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러한 언급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복된) 목적”과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방해하는 영적 반역을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입된 “플랜 B”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사탄과 그의 천사들, 그리고 사탄의 영적 세력을 추종한 인간들까지도 포함한 세력들에게 동일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46절, 심판의 결과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두 운명의 극단적인 양극성에 대해서는 다니엘 12장 2절에서와 같습니다. “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영생”이라는 구절은 구원받은 자 또는 천국에 들어갈 자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19장 16, 29절을 통해 이미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또는 사실상 신약 성경 전체)에서 “영벌”이라는 표현이 나타난 곳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 단어는 41절과 18장 8절에 나오는 “영원한 불”과 동의어로 보입니다(5:22와 18:9에서는 “지옥 불”이 등장합니다). 이 때 “영원한”이라는 단어가 갖는 함축적 의미, 즉 “영원히 지속되는”이라는 관점에서는, 불에 던져진 자들을 완전히 파괴하여 진멸시키는 것으로 보는 대신, 태우지만, 소멸시키지 않는 영원한 불에 의한 고통”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 불못에 던져진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세세토록 받는 괴로움 같은 의식적 형벌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불 자체의 은유적 측면에서 보면 형벌보다 파괴를 암시하며, 특히 쓰레기 소각장의 이미지가 지옥 개념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5:22 참고) 더욱 그러합니다. 게헨나의 불은 쓰레기가 불에 멸망되지 않기 때문에 계속해서 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쓰레기가 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의 최후 운명과 관련하여 소각이라는 이미지는 13장 42절 보다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가라지는 불에 타버리지만, 영원히 타지는 않습니다. 앞서 10장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에서 멸하다”라는 동사의 이미지에서 볼 때, “영벌”이라는 의미는 “영원히 지속되는 벌”이 아니라 “영원한 결과를 가진 벌”, 즉 불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영원한 삶을 상실한 것을 일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