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25: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마25: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마25: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25: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25: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마25: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마25: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마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마25: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마25: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마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께서 주시는 비유는 계속됩니다. 준비에 관한 두 번째 비유로서 보편적이고 사회적인 관습을 채택합니다. 결혼식은 최고의 마을 행사 가운데 하나이며, 참석자가 누구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에 영향을 미칩니다. 유대의 결혼식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모습들은 생략한 채 오로지 신랑과 “신랑을 맞으로 나간” 열 처녀, 곧 들러리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그때에”, 앞에 나온 비유의 끝부분에 묘사된 장면, 즉 주인이 오는 때와 본 비유를 연결합니다. “천국은 … 와 같다 하리니”, 시제가 마래시제이기에, 예수의 의도는 종말론적 상황을 그리고자 하십니다.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인자의 ‘파루시아’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파루시아’ 때에 천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즉 하나님의 목적이 어떻게 시행될 것인가)에 관한 비유입니다.
비유에서, “미련한”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대조됩니다. 전통적으로는 “어리석은”, “지혜로운”의 두 단어로 사용됩니다. 어리석고 현명하다는 표현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올바르고 현명한 판단이나 결정과 관련됩니다. 어리석음과 현명함의 대조는 유대 지혜 전통에서는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이 단어들은 7:24-26의 집 짓는 비유에 나오는 두 사람에게도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24장 45-51절에 나오는 첫 번째 종에게는 “지혜 있는”이 사용되었습니다. 실제적인 의미로서는 영적 지혜를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식 전에 정혼식이 맺어졌으며, 정혼한 신부는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을 자신의 아버지 집에 머물렀습니다. 결혼식과 날짜가 결정되면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신부가 있는 집으로 갑니다. 신부의 아버지에게 신부 값을 지불한 신랑은 신부와 함께 신랑의 또는 신랑 부모의 집으로 축하를 받으면서 “밤”에 이동합니다. 이 과정에서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신랑과 신부를 맞이했으며, 이들의 역할은 신혼부부를 신랑 부모의 집과 거기서 준비된 혼인 잔치 자리까지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신랑이나 신부의 친구, 친척, 하인이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오늘날의 들러리들과 같은 개념입니다. 들러리들은 신랑(과 신부)이 밤에 오는 것을 알지만 정확하게 언제 도착할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이 필요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등불을 위한 기름을 추가적으로 준비하지 않았고 현명한 자들은 준비했으므로, 지혜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차이는 신랑이 늦게 올 수 있음을 대비해서 여분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여부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등”이 실내용 등불인지 아니면 밖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횃불인지에 대해서는 가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들러리들이 야외에서 사용한 점을 고려할 때 이동식 야외 횃불로 보이며, 횃불의 경우 막대기에 기름이 적셔진 헝겊이 감겨 있었습니다. 횃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기름을 담은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처녀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곯아떨어진 모습은 신랑이 도착할 시간이 예상보다 늦은 현실을 보여 줍니다. 비유는 이들이 졸거나 자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슬리로움이란 신랑이 곧 올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여유분의 기름을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본 비유의 핵심적인 개념은 “지연” 또는 “늦음”으로서, 예수의 재림이 (예상보다) 늦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증명합니다. 실제로, 당시에 신랑이 신부 부모의 집에서 늦게 돌아오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혹자는 신랑의 도착이 늦다는 것은 신랑이 신부 부모 쪽과 신부의 값을 흥정하는 시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고 해설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현명한 들러리라면 이 정도를 예상했어야 합니다.
6절, 그러다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입니다. 이 소리는 처녀들을 깨워서 신랑과 신부를 환영하고 인도하는 일을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모든 처녀들은 일어나 각자의 등불을 점검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막대기에 헝겊이 제대로 감겼는지 점검해야 하고 불이 잘 붙도록 여 분의 기름을 묻혀야 합니다. 등불을 점검하는 것은 결국 기름이 충분히 준비됐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합니다. 당시에 기름을 바른 횃불은 15분 정도만 타올랐기에 반드시 충분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신랑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들러리들은 신랑이 생각보다 늦을 수도 있고 예상한 시간과 다른 때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자들의 문제는 신랑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상한 시간에 올 것이라고 정해 놓고 준비한 것입니다.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기름은 나눌 정도가 아니므로 기름을 파는 사람들에게 가서 필요한 분량을 구입하라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기름을 나누지 않은 행위를 윤리적으로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 비유는 알레고 리로서 깨어 준비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으며, 지혜로운 여자들이 기름을 빌려주지 않는 것을 이기적인 태도로 다루지 않습니다. 기름을 나누게 되면 신랑을 인도할 만큼의 시간 동안 등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명한 들러리들의 관심은 자신들이나 동료들의 처지가 아니라 신랑을 혼인 잔치와 신방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준비한 기름으로 신랑을 인도하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깨어 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을 위한 준비는 자신의 몫이지 남의 것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이 오자 연회가 시작되고 독자는 8장 11-12절과 22장 1-13절에 묘사된 복된 천국 잔치를 상기한다. 오직 준비된 자만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참여했으나 어리석은 처녀들이 돌아오기 전에 신랑이 왔고 혼인 잔치의 문은 닫혔습니다. 문이 닫힌 장면은 비유의 절정으로서, “준비한 자들”은 “그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어리석은 처녀들은 “주여”를 두 번 외치며 신랑과의 친밀성을 말했을 것입니다. 이 표현을 볼 때,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의 “주여 주여”는 7:21에서 심판의 운명을 겪을 사람들의 외침과 같습니다. 최후 심판이므로 더 이상의 기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주여 주여”가 7:21의 언어라면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한다”는 신랑의 대답은 7:23과 유사합니다. 마태복음 7:21-23과 25:11-12은 여러 가지 주제로 연결되는데, 비유의 “기름”은 마태복음 7장의 “열매를 맺음” 또는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상응합니다.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림도 유사합니다(7:13~14). 혹자는 12절의 언어가 자신들의 구원을 상실한 참 그리스도인들의 경우가 아니며, 예수는 “나는 저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그들이 예수의 백성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알지 못하는 백성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알지 못한다”는 신랑의 말은 면식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형벌을 의미하는 마태복음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혼인 잔치의 참여를 결정하는 요소는 신랑과의 외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름 을 준비하지 못한 비교적 사소한 과실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가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12:50). 덧붙여서, 결혼이라는 그림을 담고 있는 22:1-14과 본 비유를 연결해 보면, 22:14에서 초청받은 사람들 모두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극이 25:12에도 일어납니다.
13절은 비유의 결론입니다. 다만 25:1-12의 결론이기보다는 종말 강화 던체의 배경이 되는 주제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신랑이 올 때 실제로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든 처녀들에 관한 구체적 이야기에 관한 내용으로 보기 보다는 예기치 않은 인자의 ‘파루시아’를 위해, 예수께서는 그 날과 시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십니다. 경고를 받는 교회는 참 제자(신자)와 거짓 제자(신자)가 혼합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날”과 “그 시각”, 즉 예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4:36, 37-44). 깨어 있는 태도는 잠을 자지 않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을 맞이할 기름을 충분히 준비했는지 살피는 것이 깨어 있으라는 명령에 해당합니다. 24장 42절과 44절의 관계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깨어 있는 것은 준비하는 것과 같으며,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기름, 곧 열매)를 점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22장 14절의 강령은 이 특정 이야기를 반영한 보다 적합한 구절로 볼 수 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비유에서 열 처녀는 참(실제) 제자들(신자들)과 거짓(명목상의) 제자들(신자들)이 혼합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함꼐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준비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지고의 복을 의미합니다. 신랑과 함께하는 복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열 처녀의 최종 목적지는 신랑을 맞이하는 곳이 아니라 혼인 잔치였다는 사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장소까지 열 명이 함께 있었으나 모두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참 제자와 거짓 제자로 혼합된 교회는 인자의 오심을 목격하지만 이들 모두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여기서 결혼 잔치는 메시아의 잔치, 신랑은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는 알레고리입니다. 그리고 현명한 처녀들이 준비했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준비하지 못한 기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만, 예수께서 복음서를 통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교훈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재림 때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