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7:62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마27:63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마27: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마27:65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마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장사한 그 이튿날, 준비일 다음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모였습니다.
“준비일”은 우리의 금요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어지는 날은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안식일이라고 하면 될 것을 “준비일 다음 날”이라는 성가신 표현을 사용했을까? 안식일이라고 했으면, 해 지기 전에 열심히 장례를 마친 요셉과 달리, 유대교의 최고 당국자가 안식일 규례와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으로 묘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마태는 안식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처럼 당황스러운 사실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확인하기를, 27장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통상적인 안식일이 아니라 유월절 음식을 먹는 니산월 15일임을 보여 주고자 이처럼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 금요일은 안식일의 준비일일 뿐 아니라 그 해 유월절의 예비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준비일”은 이중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여기 다시 등장한 바리새인들은 22:41 이후에는 어떤 행동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으며 수난 기사(예수의 재판 및 죽음에 관한 기사)에 처음으로 참여합니다. 마태는 바리새인들의 모임을 부정적으로, 곧 예수를 반대하려는 모임으로 묘사합니다(22:34; 26:3, 57). 바리새인들은 12:14에서 이미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수난 기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죽음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26:57; 27:41에 나오는 “서기관들”은 23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이념적 그룹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곳에서 사두개인 대제사장들과 하나가 되어 다시 나타납니다(3:7; 16:1에서처럼). 갈릴리 이단의 확산을 막는 일은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모든 계파의 공통적 관심사였습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말합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주여”는 “각하” 정도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그들이 빌라도 앞에 모여, 예수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정보에 따라 속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의를 연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와 제자들을 유대 정통에서 벗어난 위험한 무리로 간주합니다. “속이던 자”와 “속임”은 예수를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자로 규정한 후기 유대 논증에서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이곳의 “속임”에는 예수의 잘못된 가르침과 메시아 주장뿐 아니라 거짓 “부활”의 가능성도 포함됩니다. 당국자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예수에 대한 재판에서 “사흘”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성전에 대한 흉계와 관련되며,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의 예언은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하신 말씀입니다만, 유다가 이러한 주장을 당국자에게 알려 주었을 수도 있고 예수가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는 보다 공적인(물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한) 진술이 갈릴리로부터 내려가는 길에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까지 무덤이 안전하게 되도록 명령해서, 제자들이 와서 그를 훔쳐 사람들에게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다’고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래야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서 살아난 것으로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유대 지도자늘은 여전히 백성 가운데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당국자가 두려워한 것은 예수가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거짓 부활을 꾀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이러한 설명을 고수합니다(28:13-15).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또한 그들은 만일 백성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면 순교자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해서 메시아 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을 것입니다. 신성모독 혐의로 공식적인 사형을 당한 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자신들의 권위는 예수가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허락합니다. “당신들은 경비병들을 보유하고 있으니, 당신들이 아는 대로 안전하게 지키시오.” 빌라도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만인의 요청을 들어주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서 해석상의 문제는 “경비병”입니다. 일차적인 해석은, 여기 경비병은 로마 군인들이며,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는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를 명령형으로 이해하면 빌라도의 경비병을 사용하라는 뜻이 더 명확해집니다. 28:14에서 총독의 처벌을 두려워했다는 언급을 기초로 이 해석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빌라도는 전례대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가 자신의 군대를 배치해 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책임을 떠 넘겼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는 성전 경비병을 가리킵니다. 26:47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의 일뤈으로 보는 것이고, 이 일은 그들의 소관이기 때문에 그들의 경비병을 시켜 스스로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28:11절에서 경비병이 빌라도에게 가지 않고 제사장들에게 보고했다는 사실과 총독에 대한 보고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제시된다는 사실(28:14)은 이들이 성전 경비병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후자를 따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서 무덤을 안전하게 했고, 경비병과 함께 두고 돌을 봉인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큰 돌로 무덤을 막았으나 경비병들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막아 버립니다. 경비병들은 돌과 무덤 사이를 봉인함으로써 무덤을 안전하게 지켰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무덤을 열 이유는 없으므로, 봉인한 것은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인간이 만든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