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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6:1-34 산상수훈 2

마 6:25-32 염려하지 말라

by pooh_in_the_Way 202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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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앞에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으로부터 내려진 귀결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도 일어나는 잘못으로, 아무리 종교의 내용과 형태를 갖춘다 하더라도 사람들 앞에 자신을 치장하는 일로 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본질은 세상을 사랑하는 본성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25절에 들어와서,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을 보존하시며 먹이시며 아름답게 입히시는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이가 그 생명을 지키시며 그 영광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걱정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사느냐로 우리의 신앙을 염려하여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을 넉넉히 주시는가는 창조자의 몫이요 섭리자의 몫이지 피조물의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인간이 세상과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손 아래에 둘 때 생깁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마음이 갈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분열되어 초점을 갖지 못한 것이요, 합치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두 개의 눈이 한 곳에 모아지지 않고, 각각 다른 두 개를 흐리게 보고 있는 것도 말합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과 세상을 양 쪽에 두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24절에 본 바와 같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세상을 주인으로 섬기든지 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도 놓치를 못하고 세상도 놓치지 못하여,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에게나 세상에게나 온전한 마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세상이 사랑할 만하냐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키'라는 단어는 그 헬라어 단어가 '생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한다 하여 생명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가장 중요한 것을 소유하고 나누어주고 결재할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위협하고 유혹하고 시험할 뿐이지, 세상이 해주는 것들에 진정한 영원한 내용의 것들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신을 책임진다고 자랑하면, 자신의 존재와 인생은 자신의 손 아래, 능력 안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에서는 자연히 벗어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자랑은 우리에게 요구하는, 말하자면, 자기를 부인하라든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은 무슨 이유로든 나를 낮추게 하는 것은, 그리고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미덕으로 겸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책임지는 것보다 더 큰 능력과 축복 아래 자신을 두라는 권면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들에게는, 들에 핀 백합화에게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일뿐입니다. '너희'라고 일컬어지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다하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가 됩니다.

32절, 이방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자들이라는 혈통적 범주를 넘어, 이방인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당연히 성경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로까지 경고하며 축복합니다. 

거짓말만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세상과 비교하여,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는 하나님과 비교하여 볼 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 걱정할 필요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목숨을 연장하는 내용으로 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바 생명을 어떻게 쓸까인데, 곧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는 의미와 목표라는 차원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우리의 모든 신경과 정성을 쏟아 부어야 되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하여 겁을 먹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열려한다 하여, 먼저 세상이 만든 것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 어느 쪽이 더 영광스럽고 완벽한가 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리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애쓰고 준비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어느 쪽이 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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