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새 사람>, 그리고 부활 생명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사도 바울의 입을 빌리면 "자기 의"(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입니다. 예수가 "옛 사람"을 이야기하였다면, 이에 대해 믿는 자들을 지칭하는 사도 바울 식의 표현이 "새 사람"입니다(엡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성경 전체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미리 그려 보겠습니다. 긴 이야기이지만, 맨 뒤에서부터 성큼 앞으로 건너뛰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와 연합하여 죄와 사망을 이겼고 그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그 자리에, 그 지위와 그 운명에 붙잡힌 바 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 메시아 왕국의 그 내용들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성도들이 구원 얻은 즉시, "지금" 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에 강조점을 둡니다.
이 사실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계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계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 동안이라는 것은 꼭 1,000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예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그러니까 메시아 왕국의 시작에서부터 메시아 왕국의 완성까지의 사이, 신약 시대를 말합니다. 이 첫째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믿고 죽어서 부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여 이제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는(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없는,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부릅니다)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자는 부활 생명을 얻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구원 즉시 가지는 부활이며 그리스도와의 왕 노릇인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왕노릇하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그 왕권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 모든 신자가 향유하는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이 현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 대하여 위협적이며, 더 큰 세력을 가지며, 우리는 오히려 몰리며, 때로는 세상에 지며, 세상으로부터 유혹과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지키기에도 황급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은 이 메시아 왕국의 왕권이 지금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시 요한계시록 19장, 예수의 재림 모습이 등장합니다.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19:12 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계19: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재림하시는 예수가 적대 세력들을 다 물리치고 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는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백마를 타고 옵니다. 승리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러 옵니다. 우리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정성이나 열심이나 헌신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우리 믿음의 대상과 그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러 다시 오는 것이 예수의 재림입니다. 그리고 종말입니다. 그는 13절에 있는 바와 같이, 피 뿌린 옷을 입고 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어린 양인 것을 나타내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가 다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오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15절,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을 만국을 치신답니다.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진실성과 그만이 진리 되시며 생명 되시는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왕권의 확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부터 시작되어 온, 그의 나라를 열고 시작하고 실현하면서부터 처음부터 가진 기본 원리이며 본질적 내용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요 생명이며 복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왕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생명되심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세상 앞에 증거함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세상적인 권력과는 다릅니다. 군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왕권이 물리적이고 가시적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으로 인하여 세상 앞에 큰 소리치고 군림할 조건들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을 은근히 바랍니다.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그리고 부활로 세상을 그리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깁니다. 죄와 사망을 극복하여 진리와 생명으로 증거 하며 인도하며 결실하는 것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는 왕 노릇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사도 바울이 표현한)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또 결실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이미 일어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언제든지 일으키실 지금 세상의 현실 속에서 허락되어 있는 기적들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하나님과의 화목을 집행하도록 우리에게 왕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왕권입니다. 예수가 무엇을 하기 위하여 오셨나?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기 위하여입니다. 그것이 곧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왕권은 역시 죄와의 싸움입니다. 죄를 극복하고 죄를 이기는데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는 왕노릇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가장 크게, 십자가의 필요성을 놓치는 것입니다. 십자가 대신에 의이든, 능력이든, 도덕이든, 자랑이든 인간의 것들이 대신 서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의 현실 속에서 그토록 절망하고 힘든 것이 무엇인가요? 아직도 자기 의를 뿌리 뽑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의, 자기 의란 십자가 없이 신앙을 만족시키고 싶은 우리의 교만입니다.
엡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엡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자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의를 근거한 자기 자신의 자랑을 근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로 우회하여 돌아갑니다.
가장 어려운 신앙상의 문턱이 무엇이냐 하면, 남에게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작아 보이는 일을 왜 이야기 하나? 윤리 도덕적인 접근이 아닙니다. 남에게 왜 화를 내며, 왜 너는 그렇게 바보냐라고 비아냥거리느냐 하는 것을 예수의 말씀으로 추적해 보는 것입니다. 바보를 바로라고 하는 것과 못난 사람을 못났다고 하는 것과 틀린 사람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뭐라고요? 왜? 어떠한 사람도 이런 지적을 받았을 때 스스로 고칠 힘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지적하는 사람도 그렇게 지적하고 나서는 그 지적한 못난 것을 틀린 것을 고쳐줄 힘이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누구를 지적하여 자신을 자랑하기 싶상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왜 남을 용서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십자가가 없이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모두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소원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만족시킬 실력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왕노릇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는 것으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왕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알며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자신을 위하여서든 이웃을 위하여서든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인생은 십자가에 묶여 있기 때문에 왕 노릇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서도 아니고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서도 우리의 시대와 사회 앞에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서만 왕노릇하도록 되어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사실 매일 부활과 기적을 결실하며 증언하며 체험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