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5:1-48 산상수훈 1

마 5:33-37 헛 맹세 하지 말라

pooh_in_the_Way 2021. 4. 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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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5: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살인, 간음, 이혼 문제에서 이미 이 모든 것이 율법의 진정한 본질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본질적인 의미로써 이해되지 않을 때, “율법은 자기 의에 불과해진다”라는 지적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지켜라”,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맹세를 끝까지 지키라고 가르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라는 새로운 현실에 걸맞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맹세한다고 하면서 어떠한 약속 내용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이니 하나님의 보좌를 걸고 함으로써 실상은 그 맹세의 내용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꾸 하늘을 두고, 땅을 두고, 심지어 머리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러니 예수는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귀속되는 약속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킬 만큼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신실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진실된 맹세라는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합니다. 거짓맹세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과의 약속을, 신을 속이는 거짓 약속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거짓된 약속, 거짓된 맹세가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은 그것이 사람을 속일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맹세가 신과의 약속을 위하여 동원되는 게 아니라, 또는 신 앞에 서는 진지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속이기 위하여 동원되더라 말입니다. 왜 이웃을 속여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천국의 의, 아주 넓게는 구원을 받은 자의 참 모습,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참된 생명과 진리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인 문제에서 본 두려움과 공포, 이어 간음 문제에서 본 자기 기만, 그리고 맹세 문제에서 드러나는 권력에 대한 추구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질 수 없고, 또 어떤 안전한 근거를 확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두려움에서 거짓된 해결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권력 곧 통제력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나마 자신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밖에서 보는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또는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까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그 종교의 주인이며 경배의 대상인 신과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동원하여 자신의 무기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종교가 이웃을 압제하는 권력의 수단에 불과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자신의 자녀 삼기 위하여 베푸신 구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사랑입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사랑의 본질인 생명과 진리가 허락되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생명과 진리는 그것 자체로 이미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이웃을 통제하는 권력이 됩니다. 

37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라는 결론은, 맹세와 단언적인 표현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진지한 자세로 간단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말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신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구태여 맹세까지 하면서 믿어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에서는 더 넓게, 하나님만 권력자요 통치자이며 우리는 그 통치를 누리는 자인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세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기독교 자체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헌신이 있느냐, 그리고 그 헌신에 대한 보상이 있느냐, 그런 문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것으로 세상 앞에 자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함으로 내 인생이 내가 나를 책임지고 나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영역에 아래 있지 않고, 오직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나는 증언하겠노라’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어 ‘이 세상이 대신 할 수 없는 진정한 복과 영광을 기꺼이 내가 내 삶으로 증언하겠다’는 것이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경쟁은 사람 사이에서 능력으로의 경쟁이 아니라, 성실함의 경쟁이요, 신실함의 경쟁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와의 싸움이지, 이웃과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신자들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의 방식 속에 함께 처해 있지만, 그 근본적인 원리나 내용에 있어서 또는 목표에 있어서 세상과는 아주 다른 이유이자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다름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던 때의 그 하나님이신 것과 동일하게, 온 세상과 우주와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인생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때의 그 열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정도는 언제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방불한 방식, 즉 능력과 열심과 지혜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지극함에 있어서, 동일한 통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권력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여 네 인생을 진지하게 성실하게 살아라,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 이웃 앞에 나를 세우고 있되, 내 이웃을 통제할 힘을 주시지 않고, 내 이웃을 오직 사랑하게 인도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조금 엄살을 떨자면) 실력이 있어서 사랑하는 정도까진 아닐지라도, 어쨌든 통제력을 주지 않아서, 그저 입다물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살게 하고 계십니다. 그게 예수가 가르치는 신자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 즉 순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이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생명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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