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부터 처음 읽기/마 20:1-34

마20:29-34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시다

pooh_in_the_Way 2022. 4. 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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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마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마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20: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마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중, 두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본 단락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마감하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도입 부분으로서 해석의 위치를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서, 또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또는 교회)과 예수를 배척하고 죽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 사이에 놓여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왕의 좌우편에 앉을 기대로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몰랐던 제자들도 두 맹인과 비교됩니다. 수난 예고 이후에 맹인의 치유가 배치된 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메시아의 정체와 목적을 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여리고를 떠나고 있었을 때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습니다. 마태는 예수 일행이 여리고에 들어간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여리고를 떠날 때의 장면을 묘사합니다. 여리고는 순례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있는 마지막 도시입니다. 요단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가는 순례자들은 반드시 여리고를 거쳐야 했으므로, 예수 일행과 순례하는 무리가 여리고에서 만났을 것입니다. 29절의 무리는 예수 일행처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순례자들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 과정에서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면서 따를 것입니다(21장 8-9절).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 도성을 향해 가시는 길가에 두 맹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소외된 자들로서 여리고 안이 아니라 길에, 그것도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을 벗어난 주변에서 구걸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듣고서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맹인이 예수를 “다윗의 아들”로 부릅니다. 두 맹인은 사람들에게 돈을 구하지 않고 다윗의 아들로서 치유해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 칭호는 존중을 나타내는 외침이기보다는 이들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긍휼을 구했으므로, 메시아를 향한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메시야)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최근 갈릴리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예루살렘 무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음을 보여 주지만, 마태는 그들이 어디서 이러한 지식을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칭호를 맹인과 관련된 본문에 사용함으로써 영적인 눈이 감긴 자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은 신학적으로는 예수를 왕적인 메시아로 지목해서 다윗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며(마태복음 1장 1절; 15장 24절; 21장 1-9절), 변증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알아보지도 영접하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와 죄를 강조합니다.

두 맹인이 예수께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자 무리는 꾸짖어 침묵할 것을 강요합니다. 무리는 예수의 신분과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 맹인에게 침묵을 강요합니다. 무리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정체를 다윗의 아들로 정확히 파악한 두 맹인에게 침묵하라고 했던 무리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치게 됩니다(21장 9절). 그러고 다시 예수를 죽이는 일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무리의 특징입니다. 소위 군중심리입니다.

예수는 어둠에 앉은 자들을 회복하러 오셨고, 이 사역은 갈릴리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두 맹인은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없이 맹인들은 더 크게 소리를 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칩니다. 반복적인 외침은 예수의 정체와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멈춰 서서 두 맹인을 불러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소망한다고 말씀드립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를 바라보는 제자들은 좌우편에 앉을 미래를 상상하고 무리는 정치적 승리를 가져다줄 왕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작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긍휼의 메시아이므로 소자인 맹인들의 부르짖음에 반응하십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치유의 동기는 이번에도 긍휼입니다. 종종 손을 대서 병을 치유하신 것처럼 예수는 두 맹인의 눈을 만져 고치십니다. 그러자 즉시 그들의 눈이 열렸고, 이제 치유 받은 자로서 즉시 예수를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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