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1:16-19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마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11: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 요한의 중요성과 그의 엘리야로서의 구원사적 신분에 대한 바로 앞 단락의 논의에서 암시되었던, 세례 요한과 예수의 밀접한 관계가 동시대인의 인식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강조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 세대"는 요한과 예수의 동시대를 말합니다. 이 세대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예수께서는 시장에서 놀면서 자신들의 놀이에 끼지 않는 친구들을 놀리는 어린이들의 상황으로 비유하십니다. 한 무리가 무엇을 하든지,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든지, 또는 장례식 놀이를 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든지, 도무지 다른 무리는 참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과 병행 구절을 갖는 누가복음에서는 다음의 두 절을 앞에 삽입하였습니다.
눅7: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눅7: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이 세대"를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로 한정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전하였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요단 강에 나아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는 인기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는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그를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요한의 이런 삶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요한이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면서, 그래서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합리화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거부를 당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일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이 세대"는 앞선 단락들과 이어서 기록하여, 자연스럽게 우선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반응하지 않고 거부했던 이스라엘에까지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세대"는 특정 어느 시대를 가리키기보다는 불순종과 불신의 시대 정신을 항상 가졌던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였듯이, 동시대인은 요한을 부당하게 대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예수 자신을 나타내는 "인자"도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천국 복음을 전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기쁨의 연회를 구현한 일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초대되었습니다. 인자의 반대자들은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에 냉담한 반응을 드러내는 이유를 그가 “탐식가”와 “술주정뱅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라고 종결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는 원래 독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지혜의 속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의 지혜 문헌에서와 같이, 지혜는 의인화되었습니다. 이 동사의 부정과거 시제는 격언적이며 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이 말의 요점은 지혜가 옳은 일을 행하고 궁극적으로 그 행위들에 의해 정당함이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문맥에서, 예수에게 적용되는 이 격언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행위들이,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이 비평하는 바로 그 행위들까지 포함하여 궁극적으로 예수의 정당성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지혜와 마찬가지로 잘못을 행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행한 일에 정당함을 인정받으실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지혜의 격언은 인자가 지혜와 동일시되는 한 편의 지혜 기독론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지혜를 얻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잠8: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잠8: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잠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8:35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8:36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일반적으로 이러한 동일시는 기독론의 초기 발전에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50년대 중반에 사도 바울에 의해 씌여진 고린도전서 1:장 24절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70년 전후로 하여 씌여진 마태복음에서는 이 기독론은 이미 이보다 훨씬 더 발전되었기 때문에 이 격언은 초기 전승의 한 요소이었습니다
유대 문헌들은 "지혜가 와서 자신의 거처를 찾았으나 거처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지혜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거부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는 지혜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옳고 선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의 정당성을 입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