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6:16-18 금식으로 순종하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하나님의 의,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어집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슬픔과 회개의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슬픔과 회개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온전한 순종을 약속하는 그런 나아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금식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 놀랍습니다. 예수의 지적으로 확인하는 것 같이, 금식이라는 것이 순전히 자기순화 또는 결벽성으로 자신이 확인되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됩니다.
이사야서 58장으로 가봅니다.
사58: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사58: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사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사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사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사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사58: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사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여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사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58: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사58: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여기 2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말하라는 내용입니다. 3절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을 범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 원리 및 본질에서 무엇을 어떻게 틀리고 있는지를 지적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신앙 실패의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일반 종교화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수단과 방법으로 종교를 가지는 대표적인 행태가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은 내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비는 대상이며 힘만을 목적으로 하여 섬기는 대상입니다. 이런 형태의 종교는 믿고 비는 대상이 어떤 신인지에 대하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며 생명과 진리와 의에 대하여 요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금식에 관한 내용으로 표현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실패는, 그리고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지적하는 금식에 관한 잘못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실패요,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실패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죄악을 겸손히 이해하고 회개하는 일에 실패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 금식이라는 종교행위는 행했지만, 진정한 뜻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합니다. 국가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중대한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간섭을 구하는 차원에서 간절함과 진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금식을 행하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차원에서 드려지는 회개로서 금식을 합니다.
사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금식함으로 재를 펴고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를 숙이고 하는 것들은, 금식하는 것이 "모두 내 뜻과 내 생각이 다 그릇되었고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양식이 되시고 내용이 되시고 소원이 되시사 목적이 되시고 길이 되시고 뜻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어서 힘을 내는 존재인데 내 힘, 내 생각, '나'라는 존재가 우선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와 뜻이 우선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나'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의 근거이십니다"라고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는 금식하였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금식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지 못하고 꾸중을 받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뭐라고 하느냐?
사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금식을 하는 동안에 일을 시킨 것과 오락을 구한답니다. 오락을 구한다는 것은, 금식을 한다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삼기로 한다는 것으로 하는 것인데, 오히려 자신의 기쁨을 찾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온갖 일을 시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로 해놓고는, 네가 벌써 뜻을 정하고 일을 정하고 일을 진행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자기가 결정한 일을 시키지,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지는 않지 않느냐! 금식이 결국 너의 결정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한 종교적 겉치레에 불과하다면, 그게 어찌 금식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는 금식과의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좀더 내용이 확대됩니다.
사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싸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서 간단하게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일반 종교적 차원에서 악한 행위, 부적합한 모습, 이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는 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이웃과 싸울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기독교 신앙의 핵심, 이웃 사랑으로 갑니다. 하나님 사랑이 왜 이웃 사랑과 함께 강조되느냐? 율법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고 보는 십계명을 보면,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요 나머지 6 개의 계명은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앞 4 계명은 다른 신과의 비교와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충분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충분함은 내용에서, 만족에서, 수준에서, 운명에서, 모든 필요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충분하시다. 하나님 외에 다른 보조 수단을 또는 보조 신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6계명으로 이웃 사랑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자의 종교적 책임이 아니라, 본질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의 공급은 이웃으로부터 있지 않습니다. 즉 이웃의 것을 빼앗아 우리의 필요를 채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필요가 있으며 충분합니다. 결코 우리는 이웃하고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 이웃도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에게만 답이 있는 동족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넘침과 감사가 결실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웃이 없으면 비교하여 우월감을 증명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넘치는 것을 같이 누리는 기쁨을 화합할 대상이 없는 차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까지 가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나에게 그가 원수일지라도, 그가 나를 모든 면에서 방해하거나 나에게 필요한 것과 행복과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없는 존재이기에, 미워하고 원한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이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의 행복과 신자된 특권을 놓치게 됩니다.
금식 중에도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소원하며 하나님의 뜻이 나의 기쁨이라면 이웃하고 싸울 일이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6-7절, 이웃이 당하고 있는 현실과 어려움에 우리가 도움이 되러 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신적 힘을 가진 자의 해결자로서의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조심하여야 하는 것,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 금식이 자기 자랑으로 가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가 하는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는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이웃를 질투하지 않으며 이웃과 싸우지 않으며 이웃을 심판하여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는다"이며,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드디어 이웃의 짐을 집니다.(갈라디아서 6장)" 이웃의 짐을 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의 부족함뿐만 아니라, 무식함, 게으름, 잘난 척함까지도 집니다.
예수가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말씀한 바, 믿는 자들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입니다. 빛으로부터 감출 방법이 없고, 소금은 소금된 것을 감출 방법이 없습니다. 신자된 정체성은, 즉 하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 신자의 진리됨은 곧 주변 사람들에게 맨 처음 인식됩니다. 윤리나 도덕이나 법의 차원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된 가치나 내용에서 다릅니다. 우리는 인간끼리 다투지 않으며, 인간끼리 필요를 서로 빼앗아 갖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우선 다릅니다. 그러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가 나옵니다. 사람에게서 세상적 가치를 갖는 증명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어떠한 세상적인 가치로서의 고급함으로 인정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정체성은 그리고 신앙의 핵심은 모두 이웃 앞에서 자신이 신자인 것을 항복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항복!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시는 것으로의 내용으로서의 곧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서의 항복입니다(이사야 58장 8-12절).
그래서 이사야 58장, 결론이 13절, "안식일을 지키라"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성경의 요구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도 지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것을 기념합니다. 안식하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겨져 부족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이 다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서 네 필요를 빼앗아 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네 필요를 빼앗아 간 것 같이 이웃을 원수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하면서 왜 다투느냐? 금식하면서 왜 일을 시키느냐? 네 확인을 사람 앞에서 하려고 하느냐? 사람끼리의 것으로 비교하려 하느냐?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났음으로 너는 더 이상 사람들에 대하여 죄악된 행패를 부릴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왜 아직도 부리고 있느냐? 너,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으니까, 네 필요를, 네 증명을 사람에게 하고 있지 않느냐.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지우는 멍에,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하는 압제들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아니다
입니다.